서역악(西域樂)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민간의 잡희(雜戱)의 총칭. 산악잡희 또는 각저희(角抵戱)라고도 한다. 산악이란 정식으로 격식을 갖춘 무악(舞樂)인 아악(雅樂) 또는 정악(正樂)에 대칭되는 말이다.
각저(角抵 · 觳抵)는 좁은 뜻으로는 씨름이나, 넓은 뜻으로는 산악백희를 가리킨다. 따라서 각저희는 연극사에서 볼 때는 산악백희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통례이다. 중국의 한(漢)나라 때 서역과의 교통이 열리고 문물이 수입되면서 서역의 환술(幻術)이 전래되었고, 그 영향으로 산악백희가 시작되어 당나라 때 융성하였다.
그 내용에 대한 기록은 ≪사기≫ 대완전(大宛傳)이나 ≪전한서 前漢書≫ 서역전(西域傳)에 나타나는데, 여헌(黎軒, 알렉산드리아)의 현인(眩人)과 환인(幻人) 같은 기술곡예인(奇術曲藝人)을 한조(漢朝)에 바쳤다고 하였다.
‘대완전’에서는 이들의 놀이를 ‘각저기희(觳抵奇戱)’라고 했는데, 왕국유(王國維)는 이 각저희의 내용을 후한(後漢) 때 사람 장형(張衡)의 시 <서경부 西京賦>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 내용은 오획강정(烏獲扛鼎:역기의 일종) · 도로심장(都盧尋橦:솟대타기) · 환검(丸劒)던지기 · 주색(走索:줄타기) · 탄도(呑刀:칼 삼키기) · 토화(吐火) 등의 기기(奇伎)와 곡예이고, 아울러 호랑이 · 곰 · 표범 · 용 등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假面戱)와 그 밖에 가무와 동해황공(東海黃公)의 고사(故事)를 줄거리로 한 놀이까지 있었다. ≪구당서 舊唐書≫ 악지(樂志)에는 “무릇 산악잡희에는 환술이 많은데 모두 서역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국의 산악백희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2세기 전반으로, 부여국에 전하였다가 다시 고구려에 전하여져 잡희로서 성행하였다. 중국의 사서(史書) 기록이나, 일본에 전하는 고마가쿠(高麗樂)와 고구려 고분벽화 등을 볼 때, 4세기 이전부터 고구려에 잡희가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잡희가 오기(五伎)로서 신라 향악(鄕樂)에 집대성되었다. 그러므로 신라시대의 가무백희(歌舞百戱)라는 것은 이 산악백희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신라의 가무백희의 전통을 계승하여 연등회나 팔관회 때 연행하였다.
즉, 고려시대는 가례(嘉禮)인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채붕(綵棚:오색 비단장막을 친 다락모양의 장식무대)을 설치하고 가무백희를 연행하였으며, 또한 흉례(凶禮)에 속하는 나례(儺禮)에서도 채붕 없이 가무백희가 연희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산대잡극(山臺雜劇) · 나례잡희로 이어졌는데, ≪문종실록≫에는 이들을 ‘규식지희(規式之戱:시각적인 몸짓 위주의 연희)’와 ‘소학지희(笑謔之戱:청각적인 재담 · 익살 위주의 연희)’와 ‘음악’으로 나누고 있다.
이들의 내용을 보면 규식지희에는 서인(西人) · 주질(注叱) · 농령(弄鈴) · 근두(斤頭) 등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서호희(西胡戱) · 줄타기, 농환계(弄丸系)의 죽방울 받기 같은 것, 근두박질(筋斗撲跌:땅재주)로 추측된다.
소학지희에는 수척(水尺:배우)의 중광대[僧廣大] 등이 있는데, 중광대는 민속극의 파계승놀이마당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악공(樂工)들의 음악이 있다.
연극사적으로 보면 이 여러 측면이 발전하여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산악백희는 20세기 초까지도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패에 의해 탈춤과 함께 연희되었으며, 현존하는 민속극과 남사당패의 풍물(농악) · 버나(대접돌리기) · 살판(땅재주) · 어름(줄타기) · 덧뵈기(탈놀이) · 덜미(꼭두각시놀음)와 같은 데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산악백희는 서역의 영향으로 중국 한나라 때 비롯되어 당나라에 계승되고,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산대잡극 · 나례잡희와 사루가쿠(猿樂)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