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놀이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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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사자놀음 사자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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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날 사자 모습의 탈안에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들어가 사자의 동작을 흉내내며 춤추는 민속놀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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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음력 정월 대보름날 사자 모습의 탈안에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들어가 사자의 동작을 흉내내며 춤추는 민속놀이.
내용

지방에 따라서는 주지놀음(河回)·사지놀음(廣州)·사자놀음(北靑)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나무나 대광주리·종이를 가지고 만든 사자탈 속에 두 사람이 들어가 쓰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닌다.

이때에 여유 있는 집으로 들어가 마당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논 뒤에, 그 집주인으로부터 사례로 곡물이나 금전 등을 받는다. 이 곡물과 금전은 마을을 위한 공공사업에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은 시대의 변천으로 옛날같이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연희되지는 않는다.

광복 8년 전까지만 해도 정초의 벽사(辟邪)에 북청(北靑)·정평(定平)·종성(鐘城)·명천(明川)·회령(會寧)·경성(鏡城)·경흥(慶興)·고성(高城)·횡성(橫城)·순천(順川)·광주(廣州)·안성(安城)·송화(松禾)·은율(殷栗)·해주(海州)·봉산(鳳山)·마산(馬山)·통영(統營)·수영(水營)·김해(金海)·남해(南海)·아산(牙山)·경주(慶州) 등 큰 고을 20여 곳에서 행하여졌다. 그 중에서도 지방으로는 북청의 사자놀음이 봉산가면극의 사자춤과 더불어 한때 그 이름이 높았다.

사자춤에는 머리 쪽에 한 사람, 뒤쪽에 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며, 사자가 큰 경우에는 몸뚱이 쪽에 한 사람이 더 들어가서 추기도 한다. 춤의 동작은 꼿꼿하게 높이 솟기도 하고, 앉아서 좌우로 몸을 돌려 이 잡는 시늉을 하기도 하며, 꼬리를 흔들면서 몸을 긁기도 한다. 타령이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이 사자놀이에는 대체로 사자 한 마리가 나오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두 마리도 나온다. 왕년에 경주지방에서 축사연상의 주원으로서 행하여졌던 사자놀이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나와 싸웠으며, 하회가면극(河回假面劇)에도 두 마리가 나와 싸웠다. 한국의 민속 가면극에는 사자놀음이 한 과장(科場)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봉산탈춤에서는 마부(사자몰이)가 채찍으로 사자를 때리면 사자는 성이 나서 날뛰기 시작한다. 마부가 겁이 나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나중에는 사자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지금은 사자에게 파계에 대한 용서를 빌고 함께 춤을 춘다. 이러한 사자놀음이 가면극에 한 과장으로 나오는 것은 강령(康翎)·서흥(瑞興)·황주(黃州)탈춤에서뿐만 아니라, 마산·통영·김해·수영 가면극에서도 나온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의 낙성연도(落成宴圖)에는 3명의 몰이꾼이 사자와 범 한 마리씩을 놀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887년(고종 24) ‘성천잡극(成川雜劇)’이라 하여 사자무를 시용(始用)하였다는 필사본 기록에는, “악기만방녕(樂氣萬方寧)의 곡(영산회상)에 사자 두 마리가 풍류를 따라서 몸을 흔들고 뛰어나간다.

이 사자들은 동과 서로 나뉘어 북으로 향하여 머리를 들고, 입으로 땅을 두드리고, 눈을 번쩍이며 일어난다. 풍류장단에 맞추어 꼬리를 휘두르고 발로 뛰며 좌우로 돌아보고, 또 입을 벌리고 이빨을 딱딱거리며 나가고, 물고 돌아 즐거이 춤추다가 물러가며, 풍류도 그쳤다.”고 하였다.

이 사자놀이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사자놀이가 보인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와 백낙천(白樂天)의 <신악부 新樂府>에 의하면, 이 사자놀이는 원래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그것이 당나라 때에 신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중국학자는 기원지를 서역 구자국(龜玆國)으로 보고 그것이 한(漢)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와 수(隋)·당(唐)나라 때에는 이 놀음이 중국 각지에 성행되었다고 한다.

일본학자들 역시 이 춤은 서역에서 중국에 들어왔다가 한국으로 들어오고 또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자놀이는 원래 다른 여러 가지 무악(舞樂)과 함께 신라시대에 당나라로부터 들어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차 벽사에 이용되어 민간에 널리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하회가면극의 연구』(최상수, 고려서적, 1958)
『해서가면극의 연구』(최상수, 대성출판사, 1967)
『한국가면극』(이두현, 문화재관리국, 1969)
『야유·오광대가면극』(최상수, 경상남도지, 1963)
「이조시대의 인형극과 가면극」(최상수, 『한국예술총람』, 예술원, 1964)
「사자놀음고」(최상수,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예술원논문집』 14집, 예술원,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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