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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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개념
조선후기 낙동강 연안의 초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 형성된 직업적인 재인 광대. 죽광대.
이칭
이칭
죽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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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낙동강 연안의 초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 형성된 직업적인 재인 광대. 죽광대.
내용

주로 죽방울받기·솟대타기 등의 곡예와 탈놀이를 하였다. 삼남(三南)지방 물자의 집산지였던 초계 밤마을 장터에 장이 열리면 전국 각지에서 여러 가지 흥행단이 흘러들어왔다.

그 가운데 이 초계를 근거지로 한 일단이 형성되어 탈놀음·곡예 등으로써, 특히 그곳에서 가까운 지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최근까지 영남지방에 전승되어 오던 야류 가면극과 오광대 가면극의 원류는 초계 대광대[竹廣大]가 놀았던 탈놀음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오광대 탈놀음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 대광대 탈놀음의 첫 과장이 다섯 광대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대광대 일단은 초계 외에도 가까운 신반(新反)·진주(晉州)·마산(馬山)·수영(水營) 등지에서도 공연하였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이미 없어졌으므로 오늘날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소년시절에 이것을 여러 차례 구경하였다는 노인들(초계 金台錫, 마산 金珣壹, 동래 尹在昊)의 말에 의하면, 이 놀음을 공연하기 며칠 전에 초계 대광대 일단이 신주(神主)같이 모시는 ‘울산서낭당각시’라는 인형을 대광대의 한 사람이 오른손에 안고, 공연할 마을로 들어와서 집집마다 다니며 문 앞에서 “초계 대광대 들어왔소.”하면 대개 그 집에서는 “서낭당각시 들어오면 재수가 있다.”하여 엽전을 몇 푼씩 주는데 돈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정한 날, 정한 장소에 대광대 일단이 가면과 소도구를 넣은 궤짝을 짊어지고 긴 장대는 손에 들고 와서는 놀이를 하는데, 저녁에 장작불을 피워 놓으면 먼저 악공이 고깔을 쓰고 악기를 쳐울리면서 놀이마당(무대)을 몇 바퀴 돌고는 일반 관중들을 자리에 안정시켜 놓는다.

그런 뒤 맨먼저 무동(舞童)들이 나와서 어깨 위 다섯 동까지 하여 놀고는 들어가고, 다음은 광대 한 사람이 나와서 죽방울받기를 하다가 들어가면, 그 다음은 긴 장대(대 위에는 십자형으로 되어 있다.)를 세우고 그 장대 밑에는 몇 사람이 붙어서서 넘어지지 않게 붙잡는다.

그러면 재주를 하는 광대 한 사람이 나와서 그 높은 장대를 타고 올라가 십자형 꼭대기에서 몸을 날려 넘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20분 쯤 하다가 내려오면 그 다음에는 탈놀음을 연출한다. 먼저 오방신장(五方神將) 탈을 쓴 다섯 광대가 나와 춤추고 들어가면 중이 나와 춤춘다.

또 다섯 광대가 나와 ‘양반·말뚝이 과장’을 하고 들어간 다음 ‘영노과장’, ‘할미·영감과장’, ‘사자춤과장’을 하고 마친다. 놀이의 종목·순서·내용을 보면, 최근까지 영남에서 연희되던 야류나 오광대가면극과 같다.

참고문헌

「야유·오광대가면극」(최상수, 『경상남도지』 하, 1963)
『야유·오광대가면극의 연구』(최상수, 성문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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