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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절에 큰 나뭇가지나 두 기둥 위에 나무를 가로질러 두 줄을 맨 뒤, 줄 아래 발판을 걸쳐놓고 거기에 올라앉거나 서서 몸을 앞뒤로 움직여 날게 하는 성인여자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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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단오절에 큰 나뭇가지나 두 기둥 위에 나무를 가로질러 두 줄을 맨 뒤, 줄 아래 발판을 걸쳐놓고 거기에 올라앉거나 서서 몸을 앞뒤로 움직여 날게 하는 성인여자놀이.
내용

여자들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의 하나로, 한자어로는 ‘추천(鞦韆)’이라고 한다.

남자들의 씨름과 함께 단오 때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며,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놀이이다.

우리말의 그네는 지방에 따라 근데·군데·근듸·군듸·근의·군의·그리·구리 등 여러 가지 방언이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이성지(李成之)가 쓴 ≪재물보 才物譜≫에는 ‘근의’라 하였고,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는 鞦(추)를 ‘글위 츄’, 韆(천)을 ‘글위 쳔’이라 하였으며, ≪두시언해≫에도 “萬里(만리)옛 글위 ᄠᅳ긴 習俗(습속)이 ᄒᆞᆫ가지로다.”라 하여 鞦韆(추천)을 ‘글위’라 하였다.

또, ≪악장가사≫의 <한림별곡>에도 “紅(홍)실로 紅(홍)글위 ᄆᆡ요이다.”라고 하여 모두 ‘글위’라 하였다. ≪역어유해 譯語類解≫에는 ‘그릐’라 하였고, ≪동문유해 同文類解≫에는 ‘그리’라 하였으며, <춘향전>에는 ‘근듸’라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최남선(崔南善)은 그네의 어원을 ‘근’, 곧 ‘끈[繩]의 희(戱)’를 의미하였던 말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양주동(梁柱東)은 ‘그네·군듸·굴위’ 등 수십종의 방언이 현존하나, 그것의 원형은 ‘글위’ 혹은 ‘굴위’이고, 그 어원은 ‘발을 구르다’의 ‘구르(그우르)’에 있다고 하였다.

최상수(崔常壽)는 ‘근의’를 원형으로 보고, 역시 ‘끈의 희’가 분명하다고 하여 최남선의 설을 재강조 하였다.

한편, 한자어 ‘鞦韆(추천)’에 대해서는 <고금예술도 古今藝術圖>에 “鞦韆(추천)은 혹 ‘秋千(추천)’이라고도 쓰는데, 본래 그 글자는 중국 한나라 궁중에서 축수(祝壽)할 때에 쓰던 것을 후세에 와서 거꾸로 잘못 읽어서 秋千(추천)이 되었다.” 하였고, ≪사물기원 事物紀原≫에는 “秋千(추천)을 秋遷(추천)이라 한 것은 그릇된 것”이라 하였다.

또, 고무제(高無際)의 <한무제후정추천부 漢武帝後庭鞦韆賦>의 서(序)에는 “추천(鞦韆)은 궁중 기수(祈壽)의 말인 천추(千秋)가 거꾸로 되어 추천(秋千)이 된 것”이라 하고, “한무제의 수(壽)를 기원한 고로 후궁에서 이것을 숭상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서현(徐鉉)은 그 뜻을 받아서 그의 ≪설문신수자의 說文新修字義≫에 “지금 사용하는 글자가 혁(革)을 쫓고, 또 千(천)이 遷(천)으로 변함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한궁축수(漢宮祝壽)의 사(詞)인 천추로부터 나와 후세에 와서 전도하여 추천으로 되었다는 등의 설은 한때 어용학자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추천이 새외(塞外 : 변경) 민족(民族)의 풍속이라면 그 이름도 그 민족이 사용하던 말로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고, 글자 또한 특이하므로 이 말은 그 명칭을 말소리로 표한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鞦韆(추천)’이라는 말은 원래 새외 민족의 말을 암시한 것으로, 또한 그 뜻을 표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鞦(추)’는 ‘推(추)’와 뜻이 같으니 곧 ‘밀어 끈다’는 뜻이요, ‘韆(천)’은 ‘遷(천)’과 같은 뜻이니 곧 ‘밀어 옮겨간다’는 뜻인 것 같다.

또한, 글자에 가죽 혁(革)변을 쓴 것을 보면, 이는 처음 북방의 새외민족이 가죽으로 그넷줄을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자들의 씨름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보여서 그 오랜 역사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으나, 그네에 관한 분명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와서야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송사 宋史≫에는 고려 현종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곽원(郭元)의 말을 빌려 “고려에는 단옷날에 추천놀이를 한다.”고 한 기록이 있어서, 고려 중엽에는 이미 단옷날의 그네뛰기가 민간에 널리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네뛰기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랜 것으로 추측된다. 그네뛰기 풍속이 우리 나라 문헌에 최초로 보이기는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단오절에 충헌이 그네뛰기를 백정동궁(柏井洞宮)에 베풀고, 문무 4품 이상을 초청하여 연회를 사흘 동안 하였다.”는 기록이다.

또한, ≪고려사≫열전 최이전(崔怡傳)에는 “5월에……관원들을 초청하여 연회할 때에 채붕(彩棚)을 매어 산같이 만들고 수를 놓은 장막과 깁 휘장을 둘러치고 그 가운데는 그네를 매어 무늬 놓은 비단과 채색 꽃으로 꾸몄다.”고 하였다.

또, 같은 책 신우전(辛禑傳)에는 “우왕이 거리를 순행하고 드디어 수창궁(壽昌宮)으로 가서 임치(林㮹) 등과 같이 그네뛰기를 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그네뛰기가 호화스럽게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림별곡> 제8장은 그네놀이를 주제로 삼고 있어 주목되거니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도 단옷날과 한식날의 그네뛰기에 대한 시가 한 수씩 있어서, 그네가 조정과 민간에 걸쳐 널리 성행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 조선시대에도 그네뛰기는 민간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경도잡지 京都雜志≫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여러 세시기에는 한결같이 “항간에서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단오조에는 “남녀로서 연소한 자들이 그네뛰기를 하는데, 서울이나 시골이나 다 같지만 평안도지방이 더욱 심하여 고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서로 모여 즐기는 것이 설날과 대략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네뛰기가 단오에 전국적으로 성행한 놀이이며, 특히 북쪽에서 더욱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외적으로 제주도는 8월 추석에 그네뛰기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세시기≫에 보인다.

그네를 소재로 한 각 지역의 그네노래와 단오노래, <관등가 觀燈歌>와 같은 월령체노래 등의 민요를 통해서도 그네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단오절의 대표적인 여성놀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네는 흔히 마을 어귀나 동네마당에 있는 큰 느티나무 혹은 버드나무 등의 가지에 매어놓고, 동네사람들이 수시로 나와서 뛰고 놀게 한다. 마땅한 나무가 없거나 더 큰 그네가 필요할 경우에는 넓은 터에 긴 통나무 두개를 높게 세우고, 그 위에 가로질러서 묶은 통나무에 그네를 단다.

이 통나무에는 색 헝겊을 둘러서 장식하고 그넷줄은 굵은 새끼줄이나, 또는 색실, 노끈들을 꼬아서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가설된 그네를 ‘땅 그네’라 한다.

그네놀이에는 한 사람이 뛰는 ‘외 그네뛰기’와 두 사람이 함께 마주서서 뛰는 ‘쌍 그네뛰기’가 있다. 자세는 앉거나 서며, 그네를 뛸 때는 몸이 잘 날도록 앞뒤로 몸을 움직여 구르면서 뛴다.

처음에 시작할 때 한번은 다른 사람이 그네를 밀어준다. 높이 올라가기를 겨루지 않고 단순한 오락으로 그네놀이를 즐길 때는 서로 밀어주고 타기를 번갈아 한다. 이와 같은 그네놀이와 연관된 각 지역의 그네노래가 다양하게 전한다.

달성 땅 심어진 남게

늘어진 가지에 군디 줄 매자

임이 뛰면 내가 밀고

내가 뛰면 임이 민다

임아 임아 줄 잡지 마라

줄 떨어지면 정 떨어진다. (경북 달성)

그네뛰기는 대개 4월초파일 전후부터 5월 단오 무렵까지 많이 뛴다. 계절적으로 이 무렵은 한창 신록이 우거지고 날씨 또한 청명할 때이다.

이러한 5월의 푸름 속에서 창공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나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제비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선녀의 놀음같이 보이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민요에도 그네 뛰는 여인의 모습이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가절이 아니냐

수양청청 버들숲에 꾀꼬리는 노래하네

후여넝츨 버들가지 저가지를 툭툭차자

후여넝츨 버들가지 청실홍실 그네매고

임과나와 올려뛰니 떨어질까 염려로다

한번굴러 앞이솟고, 두번굴러 뒤가솟아

허공중층 높이뜨니 청산녹수 얼른얼른

어찌보면 훨씬멀고 얼른보면 가까운듯

올라갔다 내려온양 신선선녀 하강일세

난초같은 고운머리 금박댕기 너울너울

외씨같은 두발길로 반공중에 노니누나

요문갑사 다홍치마 자락들어 꽃을매고

초록적삼 반호장에 자색고름도 너울너울

그네는 재미로 즐기기도 하지만 높이뛰기를 겨루는 경기도 한다. 흔히 단옷날에는 그네뛰기대회를 열어 경기를 하는데, 많은 상품을 걸어 흥과 열을 돋우기도 한다.

상품으로는 대개 여성의 노리개나 비단·포목 등이 걸려 있는데, 이는 남자들의 씨름에 황소를 거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경기는 주로 가설된 그네 터에서 행하며, 경기종목으로 외 그네뛰기와 쌍 그네뛰기가 있다.

승부는 그네가 높이 올라가는 것으로 판가름한다. 이 때 그네의 높이를 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네 앞 적당한 거리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방울을 매어 단 뒤, 그네가 앞으로 높이 솟았을 때 장대에 매달린 방울을 발로 차서 방울소리의 크고 작음을 가지고 승부를 가린다.

또 하나는 그네의 발판에 긴 자 줄을 매달고 그네가 높이 올라갔을 때 그 높이를 재는 방법이다. 그네를 하늘 높이 뛰기 위해서는 온몸의 탄력을 이용해야 하는데, 특히 팔과 다리에 힘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잘 발휘해야 한다.

따라서, 그네뛰기는 굳센 체력과 민첩성, 그리고 고도의 긴장감이 따르는 체육적 의의를 지닌 경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널뛰기와 함께 여성 운동의 쌍벽을 이루며, 여성 운동경기로서는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네는 역사가 오래이며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놀이로서 여성들 특유의 정취를 자아내는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며, 아울러 체육적인 놀이로서 의의가 있다. 전통적으로 그네뛰기를 대대적으로 하던 유명한 지방으로서는 서울·개성·평양·사리원·수원·남원·김천 등이다.

20세기 초엽부터는 시대의 변천으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쟁 수행상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때에 그네뛰기대회와 같은 한가한 민속놀이를 할 수 없다고 하여 모두 금하였다.

그 뒤로는 줄곧 중단되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그 이듬해 5월 단오절을 기하여 전국 곳곳에서 이 놀이가 부활되었다.서울에서는 남산과 장충단공원·사직공원에서 민간단체에 의해 대대적인 그네뛰기대회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1956년 6월에는 특별히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82회 생일기념 축하로 서울 창경궁 특설경기장에서 대한씨름협회 주최로 그네뛰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일반은 개인전을, 여자 중·고등학교 학생은 단체전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뒤 1970년부터 주부클럽연합회에서 신사임당 기념행사의 하나로 해마다 5월에 경복궁 안에서 그네뛰기대회를 거행하여 자못 활기를 띠었다.

지방에서도 밀양의 아랑제, 남원의 춘향제, 강릉의 단오제 등과 같은 향토문화제 행사 때 그네뛰기대회가 거행되고 있다.

한편, 재중(在中) 조선족의 경우 그네는 씨름·널뛰기와 단순히 즐기는 놀이가 아닌 민족운동의 한 종목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은 전통민속유희의 모습에서 훨씬 체계화되고 다양한 기술을 가미한 민족체육경기로 발전시키고 있다.

조선족은 무대예술의 한 혀 태로 볼 수 있는 교예(較藝)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네가 우리의 것보다 크며, 높이뛰기·방울차기 등으로 경기를 진행한다.

참고문헌

『고려사』
『재물보(才物譜)』
『훈몽자회(訓蒙字會)』
『두시언해(杜詩諺解)』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송사(宋史)』
『고금예술도(古今藝術圖)』
『조선상식』(최남선, 국문사, 1953)
『한국의 세시풍속』(최상수, 고려서적, 1960)
『한국의 씨름과 그네의 연구』(최상수, 한국민속학회, 1974)
『한국민요집』 Ⅴ(임동권, 집문당, 1980)
「재중한족의 민속놀이 연구」(김선풍, 『민속학』 26, 민속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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