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취송(翠松). 서울 출신. 조선 후기 판소리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의 저자.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으로서 그의 종형 면재(冕載)는 예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과업(科業)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고 부모 봉양에만 힘쓰다가 그의 어머니가 죽은 6년 뒤에야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1848년(헌종 14)에 원릉참봉이 되고 금부도사를 거쳐 순릉직장(順陵直長)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 지정(持鼎)이 184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을 때 아들을 위하여 창우(倡優)들이 벌이는 판소리·줄타기·땅재주 등의 놀이를 주제로 한 「관우희오십수」를 지어주었다.
「관우희오십수」의 서문에 의하면 과거에 합격한 아들에게 삼일유가(三日遊街) 후 벌이는 잔치에 창우들을 불러들일 돈이 없어 대신 글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각 놀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판소리연구 및 창우들의 연희에 대한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