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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 / 대금
징 / 대금
국악
개념
농악 · 무속음악 · 불교음악 · 종묘제례악 등에 사용하는 쇠로 만든 둥근 형태의 금속 타악기. 대금 · 금 · 정 · 쟁 · 동고 · 금고 · 대영 · 대양 · 울징 · 태징.
이칭
이칭
대금(大金), 금(金), 정(鉦), 쟁(錚), 동고(銅鼓), 금고(金鼓), 대영, 대양, 울징, 태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농악 · 무속음악 · 불교음악 · 종묘제례악 등에 사용하는 쇠로 만든 둥근 형태의 금속 타악기. 대금 · 금 · 정 · 쟁 · 동고 · 금고 · 대영 · 대양 · 울징 · 태징.
개설

징은 군영의 신호용 악기였으나, 군영음악의 확산으로 농악이나 무속음악 등의 기층음악에서부터 종묘제례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오늘날 농악, 무속음악, 불교음악, 대취타(무령지곡), 종묘제례악 등 다양한 장르에 사용되고 있다. 징은 전통사회에서는 대금(大金), 금(金), 정(鉦), 쟁(錚),금고(金鼓), 동고(銅鼓) 등의 명칭으로 불렸으나, 오늘날에는 이 악기들이 징으로 통합되어 전승되고 있으며, 무속, 불교 등 음악 장르에 따라 달리 불려지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징은 금(金), 정(鉦), 쟁(錚) 등으로부터 변천·전승된 악기이다. 금(金)은 고려 문종(1019∼1083)때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정(鉦)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세종실록』 오례 등에 나타나며, 쟁은 『세종실록』이나 조선후기 각종 읍지 기록에 나타난다. 징이 금(金), 정(鉦), 쟁(錚)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근거는 악기 형태의 유사성과 명칭의 혼용 때문이다.

『세종실록』에 “금(金)은 동(銅)으로 만드는데, 몸체는 둥글고, 혹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以銅爲之體圓或大或小)”고 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징 형태의 악기를 대금(大金)이라 했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군례 형명도설에는 『운회(韻會)』를 인용하여 정(鉦)과 탁(鐸)을 금(金)이라 한다고 했다. 또 『세종실록』에서 금(金)을 설명하는 가운데 『운회』에 쟁(錚)을 정(鉦)이라 한다고 했다. 이와같이 금, 정, 쟁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성이 있다.

또 실제 사용에 있어서 군영의 훈련시 정수(鉦手)에게 “명금이하(鳴金二下)” 하라고 명하여 연주자 명칭과 악기 명칭이 일치하지 않고, 선유락에서는 정수(鉦手)에게 ‘명금이하(鳴金二下)’라고 호령하고 쟁(錚)을 두 차례 친다(鉦手 鳴金二下 號令 打錚二次)라 하여 연주자 명칭은 정수(鉦手)이지만, 지시하는 악기는 금(金)이고, 실제 연주하는 악기는 쟁(錚)으로 되어 있다. 항장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보인다.

한편 금(金), 정(鉦), 쟁(錚)을 한글로 기록할 때도 『연병지남』에 금(金)을 ‘ᄌᆡᆼ’ 혹은 ‘증’으로 표기해 놓았고, 『(무신)진찬의궤』 등 각종 의궤에 취타내취가 사용하는 징을 정(鉦)이라 표기했고, 조선후기 각종 읍지의 지방군영 취타악대의 악기 중 징 계통 악기는 쟁(錚)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징 계통 악기의 명칭이 다양한 것은 형태와 명칭이 서로 유사한 까닭이라고 본다.

금(金)과 정(鉦)의 형태는 『세종실록』이나 『국조오례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모두 둥근 형태에 끈이 달린 형태이고, 서로 유사하여 변별하기가 어렵다.

금과 정은 서로 별개의 악기였으나, 점차 동일한 악기로 변화·전승되고, 쟁은 금 혹은 정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중에서는 노부에 금(金)을 북[鼓]과 함께 편성하여 사용하였고, 군영에서는 금(金)과 정(鉦)의 기능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는데,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에는 정(鉦)은 진퇴를 명하는 악기로, 금(金)은 진퇴를 금하는 악기라고 했다.

현황

오늘날 징을 사용하는 음악장르는 농악, 무속음악, 시나위, 불교음악, 대취타(무령지곡), 종묘제례악 등이다. 농악과 대취타(무령지곡), 종묘제례악에서는 징이라 하지만, 무속에서는 대영, 대양, 울징 등으로 부르고, 불교에서는 태징, 금고(金鼓)라고 한다.

징은 음고에 따라 암징과 수징으로 구분한다. 암징은 저음이 나고, 수징은 고음이 난다. 연주 방법은 취타나 농악에서는 왼손에 징을 들고 오른손에 징채를 잡고 치지만, 관현합주나 사물놀이를 연주할 때는 걸이에 걸어놓고 앉아서 치며, 굿을 할 때는 바닥에 엎어놓고 치기도 한다.

징 연주자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일반적으로 징수라 하지만, 연주자의 서열에 따라 수징·부징, 설쟁·부쟁, 설징·종징, 수징·목징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징채는 『악학궤범』에는 녹비(鹿皮)를 말아서 만든다고 했으나, 오늘날에는 나무 막대기 위쪽 끝에 천을 감아 소리를 부드럽도록 한다. 징을 칠 때 징가운데 부분을 치기도 하고, 옆 모서리를 치기도 한다.

『세종실록』에 금(金)은 동(銅)으로 만든다고 하였고, 『악학궤범』에 징[大金]은 유철로 만든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함량과 성분 등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징의 제작과정은 정형화 되어 있지 않고 재료의 비율도 정량화되어 있지 않으나, 방짜유기 제작방법에 의한 징 제작 과정은 합금, 바둑만들기, 네핌질, 우김질, 냄질, 닥팀찔, 제질, 담금질, 울음질, 가질의 과정을 거친다.

징의 음향적 특성은 두 개의 배음렬을 가졌기 때문에 울림이 풍부하고, 자연 배음 비율이어서 음고가 정확하다는 것이다.

농악을 연주할 때 징이 원박을 쳐줌으로써 전체 박자가 잡히고, 연주자들은 징 소리에 맞추어 발을 맞추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징은 고려시대 이후 군영에서 주로 사용한 악기였으나, 조선후기 이후 군영음악 뿐만 아니라 농악, 무속음악, 불교음악, 궁중음악 등 여러 장르로 확산되어 악기로서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 원인은 군영음악 담당자들에 의해 농악과 같은 새로운 음악문화가 창출되고, 무속음악이나 불교음악과 같은 기존의 음악적 바탕위에 군영음악을 받아들여 새로운 음악형식을 만들어내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춘관통고(春官通考)』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세악수·내취』(이숙희, 태학사, 2007)
『농악』(정병호, 열화당, 199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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