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오광대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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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가산 오광대 / 제1과장
가산 오광대 / 제1과장
연극
작품
국가유산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에서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국가무형유산
지정 명칭
가산오광대(駕山五廣大)
분류
무형유산/전통 공연·예술/연희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무형유산(1980년 11월 17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사천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에서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내용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유래는 가산리 노인들에 의하면 약 200∼300년의 전통을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확증할 만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가산리는 조선 말기까지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으로 7개 군의 조곡(租穀)을 징수하여 제물포로 운반하것들은 이 탈놀이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가산리에 전래되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봄에 가산의 바닷가에 궤짝이 표류해 와 주민들이 열어보니 탈과 놀이의 대사가 적혀 있는 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 뒤 탈은 궤에 모시고 놀이 때에만 썼다고 한다. 이상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가산오광대의 발상은 100년 이전으로 소급시킬 수 있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천룡제를 지내고 이어 지신밟기를 계속하다가 대보름날 밤에 연희한다. 가면을 궤짝에서 꺼낼던 항구로, 그 당시는 약 3백 호의 대취락지로서 큰 시장이 섰다고 하므로 탈놀음이 연희될만한 곳이었다. 당시에는 탈놀이를 ‘조창오광대’라 호칭하였다.

음력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천룡제(天龍祭) 직후에 시작하는 지신밟기가 정월 보름에 연희하는 오광대와 밀착되어 있는 때에는 연희자들이 모인 가운데 양반역이 간단한 고사를 지낸 다음 각기 배역의 탈을 가졌으며, 초저녁에 공연을 알리는 의미에서 조창오광대의 깃발을 앞세우고 말뚝이 · 양반 · 무당 · 풍물의 순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행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다음은 탈놀이로 제1과장(科場:마당)은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인데 황제장군(양반)을 중심으로 사방신장이 제자리에서 춤을 춘다. 이 과장은 고사(告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식무(儀式舞)이다.

제2과장은 ‘영노’이다. 사자 모양을 한 영노가 춤을 추며 등장하여 ‘비-비’소리를 내며 놀이판을 돌아다닌다. 영노는 춤추고 있던 신장들을 차례로 물어 퇴장시키고 결국 황제장군을 잡아먹는다.

이 때 포수가 등장하여 영노에게 총을 겨눈다. 영노는 포수와 대치하여 싸우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영노가 양반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양반계급에 대한 증오의 발로이다.

제3과장은 ‘문둥이’로 문둥이의 비참한 생활상을 표현한 장면이다. 눈 · 코 · 귀 · 입 · 팔 · 다리 등이 심하게 상한 문둥이 5명이 등장하여 장단에 맞추어 병신춤을 추고, 도(都)문둥이의 지휘에 따라 장타령을 하기도 하고 앉아서 이를 잡기도 한다.

또한, 투전을 하며 싸우기도 하는데, 이때 천연두를 앓는 아들을 업은 병신 어딩이가 투전판에 개평을 청했다가 발에 채고 매도 맞는다. 화가 난 어딩이의 고발로 순검이 와서 모두 포박하여 끌고 나간다.

제4과장은 ‘양반’으로 양반을 모독하는 말뚝이 재담의 장이다. 양반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춤을 추는데, 하인 말뚝이가 들어와 문안드리고는 상전양반을 돼지에 비유하며, 또 양반의 마누라를 자기 배 위에 더덩실 싣고 춤을 추었다고 희롱한다.

이어 말뚝이가 외설스러운 말로 양반의 신분을 야유하면 양반은 이에 맞서 자기의 지체와 재주를 자랑하다가 함께 춤을 추며 퇴장한다.

제5과장은 ‘중’으로 파계승의 장이다. 소무(小巫)가 서울애기를 데리고 와서 양반 앞에서 춤을 추는데 상좌(上佐)가 노장을 모시고 등장한다.

노장이 서울애기를 유혹하여 업고 달아난다. 말뚝이에게 잡혀온 노장은 매를 맞고 양반에게 꾸지람을 들은 뒤에 음양타령을 부르며 굴갓 · 염주 · 죽장을 차례로 던지고는 마지막으로 썼던 가면까지 벗고 여러 가지 단가를 부르며 속화(俗化)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소리꾼이 뛰어들기도 한다.

제6과장은 ‘할미 · 영감’으로 영감과 본처인 할미와 첩인 서울애기와의 애정적 삼각관계를 표현한 장면이다. 할미가 궁둥이춤을 추면서 등장하면 아들인 마당쇠가 따라 들어와 외설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는다. 또한 봉사이며 신장수인 옹생원이 와서 할미를 희롱하고 옹생원이 준 돈으로 과자를 사먹은 마당쇠가 배앓이를 하니 의원이 와서 침을 놓아 고친다.

영감이 서울애기를 데리고 들어와 재산을 분배하되 좋은 것은 모두 첩에게 주고자 하므로 할미는 반발하고 영감은 홧김에 물건을 부수다가 동티로 까무러친다. 옹생원을 불러다가 괘를 빼고 독경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끝내 무당을 불러 오구굿을 한다.

등장하는 가면은 오방신장 · 영노 · 양반 · 말뚝이 · 문둥이 · 노장 등 30개로 대부분 종이로 만들고, 양반 · 문둥이 · 말뚝이는 바가지로 만들었다(도표 참조). 반주악기는 꽹과리(쇠) · 징 · 북 · 장구 등이며, 장단은 굿거리가 주로 사용되고 춤은 덧뵈기춤이 주로 쓰인다.

1960년 마지막 놀이를 한 뒤 중단되었다가 1971년 대사를 채록하고, 1974년에 재연한 이후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8년 현재 예능보유자로는 한계홍(韓季弘, 옹생원 · 악사 · 가면제작) · 김오복(金五福, 양반 · 오방신장) · 한윤영(韓允榮, 말뚝이 · 할미 · 가면제작) 등이 지정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산오광대보존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마을민 40여 명이 함께 활약하고 있다. →탈놀이

참고문헌

단행본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정상박, 집문당, 1986)
『야유오광대』(강용권, 형설출판사, 1977)

논문

「가산오광대의 특성」(강용권, 『국어국문학』 55∼57합병호, 1972)
「가산오광대」(이두현, 『한국연극』 13, 1977)
집필자
강용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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