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대동여지도 중 경상남도 사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상남도 사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정의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고성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한려수도와 사천만 및 남해군, 북쪽은 진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54′∼128°11′, 북위 34°52′∼35°09′에 위치한다. 면적은 398.6㎢이고, 인구는 11만 545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7개 면, 6개 행정동(27개 법정동), 231개 행정리(90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덕곡리에 있다.

자연환경

진주만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의 양안에 걸쳐 있다. 시역의 중앙부는 좁고 긴 사천만(泗川灣)이 내륙 깊숙이 만입해 지역을 동부와 서부로 크게 나누고 있다. 서부지역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평탄한 편은 아니나 표고 100∼200m의 기복이 낮은 구릉지가 대부분이다. 그 줄기가 남쪽으로 차츰 낮아져 그 끝은 광포만과 사천만 등의 바다에 닿는다. 동부지역은 사천만 만구지역의 평야부와 사천에서 구삼천포 해안 가까이 약 12㎞의 폭이 매우 좁은 해안 저지대가 전개되고 있으며, 동쪽은 고성쪽으로 동서 방향의 병영산맥이 연이어 있다.

이 시에는 와룡산(臥龍山, 799m)·흥무산(興武山, 455m)·이명산(理明山, 570m)·봉대산(鳳臺山, 409m)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구룡산(九龍山, 298m)·남산·성황당산(城隍堂山)·봉명산(鳳鳴山)·무선산 등이 있다.

주요 하천은 북부 중앙의 가화천이 남강댐의 인공수로로서 사천만에 이르며, 와룡산 동쪽을 흐르는 백천(白川)이 사천 선상지를 지나 사천만으로, 길호천이 동북부와 사천읍을 흘러 사천만으로 각각 흘러든다. 하동군에서 발원하는 서부의 곤양강(昆陽江)은 서부지역을 남류해 광포만으로 흘러들면서 유역에 평지를 형성하였다.

기후는 온난습윤한 난대성 기후를 띠며 연평균기온 14℃,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7.1℃이며, 연강수량은 1,701㎜, 평균습도는 69.8%이다.(2007년 기준)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의 경상계 지층이지만 남쪽의 산지부는 불국사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생은 대나무·동백나무·탱자나무·비자나무·팽나무 등의 난대성 식물이 자란다.

역사

사천만 해안평야 지대의 곳곳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특히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서포(西浦)지방의 조개더미에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상당한 인구가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삼한시대에는 이 지방이 변진12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에 나타난 사천시의 처음 이름은 3세기 초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이다. 그 뒤 삼국의 정립으로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이 지역은 한때 백제에 속하기도 했으나, 6세기 경 법흥왕대에 이르러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여러 지역이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하나는 사물현으로 오늘날 사천시의 동부이며, 하나는 곤명현(신라 때는 포촌현, 또는 하읍현)으로 오늘날의 서부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축동면 전역과 고성군의 상리면·하이면의 일부 지역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본래의 이름은 사물현(泗勿縣)인데 757년(경덕왕 16) 사수현(泗水縣)으로 개칭해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 사수현을 진주목(晋州牧)으로 이속했고, 1011년(현종 2) 사주(泗州)로 개칭하였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서부에 있었던 곤명현의 삼국시대 이름은 알 수 없으나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의 영현이 되었다. 성종 때 조세미(租稅米)를 수송하기 위해 전국에 12조창을 두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사천현 남쪽 통조포(通朝浦)에 설치되었다. 992년(성종 11)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安宗) 욱(郁)이 사수현으로 유배되어 와룡산의 배방사(排房寺)에서 일생을 마쳤다. 현종도 어린 시절 이 곳에서 지내면서 갖가지 비화를 남겼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이 심할 때 이 지방은 침입로가 되었으며 1379년(우왕 5)과 그 이듬 해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

1413년(태종 13) 현의 이름을 사천(泗川)으로 고치고 1415년에는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현정(縣政)을 겸장하였다. 1419년(세종 1) 세종과 단종의 어태(御胎)를 곤명현에 안치했으며, 남해안과 합쳐 곤남군으로 승격하였다. 1437년 남해현을 복구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今陽部曲)을 편입해 곤양군(昆陽郡)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수군이 거북선을 앞세우고 사천 선창에 있는 왜수군을 외양으로 유인해 전멸시킨 사천해전이 치러졌다. 1759년(영조 35) 곤양군의 호구수는 3,759호 1만 6,374인이었고, 1771년 사천현의 호구수는 3,313호 1만 4,620인이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곤양군과 합병되면서 군의 이름이 사천군이 되었다. 이 때 창선면(昌善面)이 남해군으로, 문선면(文善面)이 진주군으로, 남양면(南陽面)이 고성군으로 분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전국을 다시 13도제로 개편하자 곤양군은 사천군에서 분리되고 사천군과 곤양군은 진주부에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6년 남양·문선·축동의 3개 면이 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곤양군을 사천군에 통합하면서 금양면과 서면을 하동군에 이관했으며, 삼천리면을 수남면(洙南面)으로 개칭하였다. 1918년 문선면과 수남면을 삼천포면으로 통합하였다. 1931년 11월 1일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읍동면·읍서면·읍남면이 각각 정동면·사남면·용현면으로 개칭되었다.

1956년 7월 8일 삼천포읍은 남양면을 합해 삼천포시로 승격되어 사천군에서 분리되었으며, 같은 날 사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76년 사천읍 수석리에 새 청사가 완공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사천시가 되었다. 1998년 행정동 통합으로 대방동을 동서동으로, 동좌동을 선구동으로, 봉이동을 향촌동으로 통합, 남양1,2동을 남양동으로 통합하여 1읍 7면 6동으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른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로 곤명면 용산리에 다솔사(多率寺)가 있다. 그 경내에는 다솔사 극락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다솔사 응진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다솔사 보안 암석굴(경상남도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있다. 이 곳의 김해 봉화산 마애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은 높이 2m, 너비 0.7m의 입상을 양각한 것이다. 와룡사지는 삼한갑찰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본촌리사지에서는 명문이 있는 암키와와 해무리굽청자·청동불상·청동소탑편이 출토되었다.

유교문화재로는 사천읍 선인리의 사천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구암리의 구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곤양면 송전리의 곤양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가 있다. 정자와 누각으로는 축동면 구호리의 쾌재정(快哉亭), 사천읍 선인리의 수양루(洙陽樓), 곤명면 금성리의 연강정(練江亭), 용강리의 다솔사대양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가 있다.

분묘로는 신벽동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1977년 지정), 용현면의 덕곡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1979년 지정)를 비롯해 좌룡동지석묘·봉남동지석묘군·이금동지석묘군이 있다. 정동면 소곡리의 선사유적은 지석묘 또는 석관묘와 관련된 무문토기시대의 유적이며, 봉남동 청동기시대 토기산포지에서 무문토기의 저부편이 채집되었다. 정동면 예수리고분군 의 석곽묘와 옹관묘에서 고배·호·관옥·곡옥·이식·방추차가 출토되었는데, 성황당산성과 인접해 있다. 사천읍 두량리고분 은 한 봉토 내에 2개 이상의 묘실을 축조한 것이고, 관율주거지는 대규모 집락유적으로 승석타날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많이 노출되어 있다.

구암리선돌은 암수 한 쌍이며, 사남면 화전리에는 병둔마을선돌과 지석묘가 있다. 그리고 용현면 선진리의 사천조명군총(경상남도 기념물, 1985년 지정)은 정유재란 당시 희생된 조선·명나라 연합군 전사자가 묻힌 곳이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등섬유적에서 세형동검·세형동모·동환유리구슬과 청동제 이형금구가 출토되었고, 마도유적에서 무문토기편과 청동기유물이 일괄출토되었다. 늑도동의 삼천포늑도패총(경상남도 기념물, 1985년 지정)에서는 기원전 1세기 경의 주거지와 분묘·패총이 조사되었는데 유물은 옹·고배·개·시루·소형토기 등과 판상철부·철검편·도자 등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옛 가옥으로는 곤양면에 사천환덕리조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가 있다. 사남면 유천리제민창지에서는 6기의 건물터가 조사되었다. 장암창지는 1660년(현종 1)에 설치된 곳이다. 가산창지는 추동면 가산리 갯가에 있는 영남우창인데, 이 조창을 위해 설치한 것이 축동면의 가산리석장승(경상남도 민속자료, 1974년 지정)이다.

탑비로는 곤양면 흥사리에 사천 흥사리 매향비(보물, 1978년 지정)가 있다. 향촌동의 삼천포매향암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은 향포산의 중턱 자연 암석에 23행 35자의 음각으로 새긴 명문으로 유명하다.

무형문화재로는 가산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 1980년 지정)·판소리고법(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985년 지정)·판소리수궁가(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985년 지정)가 전한다.

산성으로 백제 무왕 때 쌓은 대방동의 각산산성(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에는 각산봉화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사천읍 선인리·정의리에 걸쳐 있는 사천읍성(경상남도 기념물, 1994년 지정), 곤양면 성내리의 곤양읍성이 있다. 사등동의 사등산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500m, 높이 2m 정도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정동면 예수리의 사천성황당산성(경상남도 기념물, 1993년 지정)에는 우물과 못이 남아 있다. 화암리의 두음벌산성은 태종 때 쌓은 성이다. 용현면의 선진리성은 조선시대의 선소로 유명한 선진항 북쪽에 있으며, 현재 토성이 1㎞ 가량 남아 있다.

대방동의 대방진굴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은 순조 때 둑을 쌓아 축조한 것이다. 안점봉수는 진주 각산과 망진봉수에 응답한 보조선의 간봉이다. 사천해전지는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승리를 거둔 곳이다.

곤명면 은사리에는 세종대왕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1975년 지정)·단종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1975년 지정)가 있는데, 1734년(영조 10)에 태실비를 세웠다. 이 밖에 곤양면 성내리에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사남면 우천리에 사천 연천숲(경상남도 기념물, 1994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12창지의 하나인 통양창지와 진주소촌역에 속한 소촌도의 참역이었던 관율역지도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사천향교(泗川鄕校)와 곤양향교(昆陽鄕校)가 있었다. 사천향교는 1421년(세종 3) 사천읍 선인리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되어 1446년에 향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5년(인조 23)에 중건하고 몇 번의 중수를 거친 뒤 1763년(영조 39)에 다시 중건되었다. 곤양면 송전리의 곤양향교는 조선 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후에 복설되어 1807년(순조 7)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고, 1822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그 밖에 구암(龜巖)이정(李楨)이 1568년(선조 1) 구암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는데 1611년(광해군 3)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천읍 구암리에 향리인들이 구산사(龜山祠)를 건립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어 구계서원(龜溪書院)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지금의 사천초등학교와 곤양초등학교가 1911년에 개교하였다. 1946년에 삼천포중학교, 1951년에 사천중학교, 1952년에 사천농업고등학교가 각각 개교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9개교, 전문대학(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1개 교가 있다.

삼천포문화원과 사천문화원이 있어서 시민의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천포12차농악의 전수관이 1975년도에 문을 열었다. 향토문화행사로는 삼천포지역의 노산문화제가 매년 열리고, 사천지역의 사천수양제가 10월에, 한려문화제가 4월에 열린다.

민속

이 지방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가산오광대이다. 가산은 조선시대의 조창이 있었던 곳이다. 비교적 부유했으며 대취락을 이루고 있었고 다른 지방과도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러한 여건에서 탈놀음이 성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놀이는 당시에‘조창오광대’라 불렀다고 한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연희되었다. 40여 명이 출연해 1과장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 2과장 영노, 3과장 문둥이, 4과장 양반, 5과장 중, 6과장 영감·할미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 놀이는 영남 오광대 계열의 특성을 지녔으면서도 영감·할미과장에서 ‘마당쇠’·‘옹생원’·‘서울애기’의 등장이라든가, 또 이 과장의 극적 구성이나 표현에서 중부지방의 것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는 조창이 있었던 이 지역의 특성 때문이다. 한편,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매향비는 일종의 호국민속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 우왕 때 불도들이 해안이나 물가에 향을 묻고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지방의 동제는 축동면 가산리의 ‘천룡제(天龍祭)’가 대표적이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지내며, 동제에 이어 지신밟기와 오광대놀이가 행해진다. 음력 12월 15일 경 제사비용을 준비하고 제관을 뽑는다. 제관은 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 짐승을 죽이지 않은 사람, 출산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선출하며, 제사 3일 전부터 제사 3일 후까지 금기한다. 제관과 축관은 섣달 그믐날부터 목욕재계한 뒤 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제당 안에 지키고 앉아 있는다. 보조원은 시장에 가서 값을 깎지 않고 제물과 제에 필요한 물품을 산다. 제일 4, 5일 전 산 수퇘지를 당산하(堂山下)에서 목을 찔러 잡아서 제물로 만든다. 이 제사 때에 모시는 신은 가산리석장승으로 조선시대 가산조창을 수호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현감들이 공물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여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도 이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 밖에도 노거수(老巨樹)에 대한 신앙으로, 정동면 고읍리·풍정리 느티나무, 축동면 구호리 느티나무, 사남면 화전리 팽나무, 용현면 덕곡리 느티나무 등에 대한 동제가 열린다.

설화·민요

이 고장은 남해안에 위치한 지역적인 여건으로 인해 왜구의 침략에 얽힌 호국설화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남아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관계된 것이 많이 전한다. 이 밖에도 풍수설화 등이 전하고 있다.

오봉산에 얽힌 전설은 조선시대의 원한풀이 이야기이다. 백정 영호가 밤마다 양반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다가 양반집 하인들에게 붙잡혀 동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지 않고 혼자서 양반놀이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끝까지 버텼다. 화가 난 고을 원이 곤장 200대를 치도록 명해 그 백정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원은 상민이 함부로 양반행세를 하면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경고하려고 시신을 동구 밖 소나무에 매달아놓게 하였다. 그 뒤 마을에는 영호의 죽은 귀신이 나타나 마을의 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굿을 하고 고사를 지내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소가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이 고을은 피폐해 갔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할 때 덕망 있는 새 원이 부임해 왔다. 어느 날 밤 원이 마을의 재앙을 막을 해결책을 구하고자 고심하고 있을 때 귀신이 나타났다. 귀신은 마을에 작은 산 다섯 개를 만들고, 그 산마다 연못을 파고 수양버들을 심어 자신이 안식하게 해주면 다시는 소를 죽이지 않겠다고 한 뒤 사라졌다. 고을 원은 즉시 온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정성을 다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 뒤부터는 소가 죽지 않았으며, 그 때 만든 산이 오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구부총전설(九夫塚傳說)」은 사천읍 두량리 추동의 싫다고개에 있는 구부총에 얽힌 전설이다. 이 곳은 옛날 어떤 팔자 사나운 여자가 아홉 번이나 시집을 갔는데, 시집 가서 얼마 안 있으면 남편이 원인 모르게 병들어 죽어 그 시신을 묻은 곳이다. 주위에서 열번째 시집가기를 권하자 이제는 싫다고 하면서 고개를 넘어 먼 곳으로 갔다고 한다. 지금도 싫다고개가 있다.

능화봉은 고려 현종의 탄생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곳으로,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에 있다. 경종의 비 황보씨(皇甫氏)가 과부가 되어 사저에 있을 때 왕욱(王郁)과 사통해 현종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왕비와 사통한 죄로 욱은 능화리에 귀양 와서 이 곳에서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현종에게 금 한 주머니를 몰래 주면서 금은 술사에게 주고 자신은 성황당 남쪽에 있는 구룡동(九龍洞)에 묻되 반드시 엎어서 묻으라고 유언하였다. 그 곳이 바로 왕기(王氣)가 있는 장소여서 이듬 해 현종이 왕에 즉위하였다. 그 아버지 욱은 효목대왕(孝穆大王)에 추존되고 그의 호를 안종이라 하였다. 한편 현종의 어머니 황보씨가 현종을 잉태했을 때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가 오줌을 누자 도성에 흘러넘쳐 은바다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현면 온정리에는 「용머리바위전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비극적인 영웅의 이야기인 아기장수설화 계통과 풍수설화가 혼합되고, 여기에 호국설화 계통인 왜구이야기까지 곁들여져 전형적인 적층문학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기 없는 한 부부가 백일기도 끝에 아들을 낳았는데 온갖 길조가 나타나며, 이적을 행하고, 와룡산에서 도사를 만나 도술을 전수받는다. 그러나 역모를 일으킬까 두려워한 부모는 아기를 살해하고, 간악한 풍수가 아기장수 무덤의 혈맥을 끊어 왜구의 침입을 자초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3단계 구성을 가진 특색이 있다.

이 밖에 정동면 풍정리의 「풍정숲 효자전설」, 사남면 죽천리당병소(唐兵沼)와 병둔(兵屯)의 지명유래담 등이 전한다.

이 지방의 민요는 진주·고성·하동 등 인근지역의 것과 동일한 유형이 많다. 진주의 「진주영장 백말타고」와 고성의 「고성학동 진골목에」 등 길이가 긴 산문체 형식의 민요가 이 지방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심기노래 중에도 남해 금산, 고성 학동, 진주 단성 등의 지명이 자주 나와 인근지역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이 지방에서는 모심기노래가 많이 불렸다. “아침이슬 상추밭에 불똥꺾는 저큰아가 불똥이사 꺾네마는 고운손목 다적신다…….”라든가 “임이죽어 제비되어 추녀끝에 집을지어 듬성보고 남성봐도 임인줄로 내몰랐네…….”하고 부르는 「모심기노래」는 그 대부분이 남녀 간의 상사·편애·연적·애첩에 얽힌 것들이 많고 주거·기호·의복·오락을 노래한 것도 발견된다.

이 밖에도 “저건너 울도담도 없는집에 처자한쌍 넘나든다 철낚시로 낚아낼까 돌물게로 잣아낼까 낚아내면 능사되고 능사상사 고줄맺어 풀리도록 살아보세.” 하고 부르는 「상사노래」도 있다. 이 지방에서 불리는 많은 민요에 한결같이 흐르는 음악적 선율은 애상적인 것으로 전통적인 우리 가락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산업·교통

총 경지면적은 5,863㏊이며, 이 중 논이 3,627㏊, 밭이 2,236㏊로서 각 점유율은 논이 62%, 밭이 38%로 밭보다 논이 배 이상의 비율을 차지한다. 가구당 경지면적 0.82㏊이다. 농가호수는 7,143호, 농가인구는 1만 5,880명으로서 시 전체인구에 대한 농가인구비율은 14%로서 경남의 다른 시군에 비해 적은 편이다. 농업진흥지역 3694.1㏊와 농업보호구역 525.3㏊를 설정하여 농업생산을 장려하고 있다.

농업 생산은 현재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옛 삼천포와 사천읍지구를 제외한 전 시역에서 이뤄지고 있으나 주로 서부의 서포·곤양지구의 생산이 높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밀 등의 곡물이다. 이 밖에도 채소류와 감자·고구마 등의 단위면적당 생산고가 높다. 특용작물로는 참깨, 들깨 등을 재배하며, 복숭아·포도·배·감 등의 과일류와 약용작물인 백작약·적작약·일천궁 등을 많이 생산한다.

주민의 약 4% 정도가 어업에 종사하며 서부경남의 연안어업 전진기지로서 연간 어획고가 약 5만t에 달한다. 주로 쥐치·멸치·갈치·전어·고등어 등이 근해 수역에서 많이 잡히며, 바지락, 백합 등의 패류와 해조류도 채취되고 있다. 특히, 쥐치는 한때 전국의 80%가 이곳에서 잡혔으나 지속적 남획으로 지금은 거의 고갈된 상태이다.

광업을 살펴보면 사천시에는 총 24개 광구, 즉 금속광 8개와 비금속광 15개가 있으나 모두 미가행이다. 총사업체 수는 9,592개이고 종업원 수는 5만 129명이다. 농림어업 관련 업체는 17개 업체에 140명이 종사하고 있다. 광업관련 업체는 1개이며 34명이 고용되어 있다.

2차 산업에 해당하는 제조업은 930개 업체로서 총 1만 8926명의 종사자가 있다. 이중 식료품 및 담배제조업의 비중이 가장 큰데 34개 업체에 990명이 종사하고 있다. 이외에 9개의 비금속광물제조업체에도 229명이 고용되어 있다.

3차 산업에 해당하는 서비스업의 비중은 압도적으로 크며 사천시의 경우도 서비스업체가 제조업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7,842업체이며 2만 4594명이 일하고 있다. 도매 및 소매업의 비중이 가장 크며 2,785개 업체에 6,329명의 종사자가 있다. 숙박 및 음식점업의 비중도 큰 편인 데 2,155개 업체에 5,245명이 일하고 있다.

상업 활동은 동금동의 삼천포장과 서포면서포장이 4·9일, 사천읍사천장과 곤양면곤양장이 5·10일, 곤명면완사장이 1·6일에 열린다. 주요 거래품목은 농산물과 건어물·수산물 등이다. 사천시는 경남항공 국가산업단지의 최종 승인과 종포일반산업단지 준공 예정, 항공산업체의 생산성 고도화를 위한 항공우주특화단지 완료 예정, 항공 MRO 사업 준비 등 항공우주산업의 중심도시로 발전이 예상된다.

교통은 3호선이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 진주와 사천읍을 지나 시내로 연결되고, 사천읍내에서 갈라지는 33호선은 고성군으로 지난다. 2003년 개통된 창선·삼천포대교를 통해 남해군과 연결된다. 그 외에도 지방도가 있어 편리하며, 남해고속도로가 시의 북부를 지나고 있다.

도로는 총 1,295개 노선 1,354㎞로 고속도 2노선 22㎞, 국도 4노선 53.5㎞, 지방도 8노선 118㎞, 시도 1,157노선 823㎞, 농어촌 도로 124노선 336㎞가 있다. 고속도로로는 남해선(고속 10호선), 중부선(고속 35호선), 일반국도로는 국도 2호선, 3호선, 33호선, 77호선 등이 있다. 국가지원 지방도로는 지방도 30호선, 지방도 58호선이 있다.

1953년 진주 개양·사천간의 사천선이 준공되었고 사천·삼천포 구간은 1965년 개통되었다. 1968년 진주·순천간의 경전선을 준공하고 1970년부터 국내 최초의 순환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1980년에 진삼선이 운행을 중지하였다.

관광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내륙호 같은 잔잔한 사천만을 사이에 두고 있어 명승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지도 많고 또한 피해도 많았던 곳이다. 삼천포항 앞바다, 한려수도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무인도 학섬은 삼천포의 빼어난 명승지로 울창한 해송에 학과 왜가리가 날아들 때면 마치 눈이 내리듯 장관을 이룬다. 또한, 모래가 곱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향촌동의 남일대해수욕장은 여름철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이며,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유람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왜적에게 치명타를 가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묘충공원은 한려수도의 빼어난 해상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이 밖에 대방동의 대방진굴항은 팽나무와 소나무가 이루는 숲 가운데 만들어진 100여 평의 바다못으로, 자연경관의 극치를 이룬다. 각산산성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며, 숙박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여름철이면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동금동의 삼천포재래시장은 삼천포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입지조건이 매우 양호하며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사천시에서 이루어지는 와룡문화제는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유년시절 와룡산에 기거(寄居)하다가 훗날 왕이 되었던 것과 같이 사천시의 번창을 위한 문화예술행사이다. 사천세계타악축제는 12차농악, 가산오광대, 마도갈방아소리, 판소리고법 등 전통문화예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이루어지는 축제이다. 삼천포대교 기념공원 및 사천시 일원에서 행해진다. 매년 5월 첫째 주∼둘째 주 사이에 행해지는 와룡산비룡제는 산신제, 야영대회, 자연보호 및 철쭉 산행으로 이루어지는 이 고장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축제행사이다.

동림동의 문화예술회관은 지역문화예술의 산실로서 대공연장과 소공연장으로 이루어진다.

수석리에 사천체육관, 용강동에 삼천포체육관, 정의리에 사천공설운동장, 벌리동에 삼천포공설운동장과 수영장, 삼천포공설테니스장, 사천읍에 관덕정궁도장 등이 있다.

읍·면
  1. 사천읍(泗川邑)

시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은 28.72㎢, 인구는 1만 866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평화리이다. 본래 사천군 지역으로 사천군청이 있으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화신(和信)·평례(平禮)·상지(尙智)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서면(下西面)과 북면·상주내면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1925년 사천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동부는 무선산(舞仙山, 278m) 등이 진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구릉성 산지이고, 서부는 낮고 평탄하다. 무선산에서 발원하는 길호강 등의 작은 하천들이 서쪽으로 흘러 중선리·용당리·사주리 하천유역에는 넓은 범람원이, 하구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였다. 거무실·관율·두량 등에는 관개용 저수지가 많으며, 특히 두량저수지는 규모가 큰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백작약·적작약·일천궁 등을 재배한다. 한우·돼지·젖소·닭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교통은 진주∼삼천포 간의 국도가 읍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사천과 고성을 연결하는 국도가 사천에서 동남 방향으로 통한다. 그리고 사천만을 통한 해상교통도 발달하였다.

문화유적은 선인리의 사천향교, 구암리의 구계서원, 사천리의 강양향교, 선인리와 정의리에 걸쳐 사천산성이 있다.

평화(平和)·선인(宣仁)·정의(貞義)·수석(洙石)·사주(泗洲)·용당(龍塘)·중선(中宣)·구암(龜巖)·장전(獐田)·금곡(琴谷)·두량(斗良) 등 11개 리가 있다.

  1. 곤명면(昆明面)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69.71㎢, 인구 3,17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림리이다. 본래 곤양군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소곡면(所谷面)·초량면(草梁面)·성방면(城方面) 일부를 병합하고 곤명면이라 하여 사천군에 편입되었다. 옥녀봉·산성산·송비산 등의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면의 서북부 삼정리에서 발원한 서천(西川)이 면의 중앙을 동쪽으로 흘러 덕천강과 합류해 진양호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잎담배 등과 포도·복숭아·배·감 등의 과일류를 재배하고 약용작물의 산출도 많다. 교통은 경전선 철도와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송림리에서 서포면 선전리를 잇는 지방도로가 남부를 지나고 있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금성리에 연강정, 용산리에 다솔사와 극락전·응진전·대양루, 은사리태봉에는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

송림(松林)·금성(金城)·마곡(麻谷)·본촌(本村)·봉계(鳳溪)·삼정(三亭)·성방(城方)·신흥(新興)·연평(蓮坪)·용산(龍山)·은사(隱士)·작팔(作八)·정곡(正谷)·조장(助場)·초량(草梁)·추천(楸川) 등 16개 리가 있다.

  1. 곤양면(昆陽面)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61.14㎢, 인구 3,8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성내리이다. 본래 곤양군 지역으로 동부면(東部面)의 대진(大津)·포곡(浦谷)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리면의 10개 리와 서부면 일부를 병합해 곤양군의 소재지이므로 곤양면이라 하여 사천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곤양면 가화리 일부가 진양군 내동면으로 편입되었다. 서포면의 서북단에 이명산이 있으며, 북쪽에 약간의 구릉이 기복해 있다. 곤양강이 면의 서부를 남쪽으로 흐르고, 구릉성 산지에서 발원하는 작은 하천들이 면 곳곳에서 사천만으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잎담배와 과일류를 재배한다. 수산업도 활발해 어패류와 해조류가 많이 나며, 특히 투석식(投石式) 양식장에서 기른 굴은 이 지방의 특산물이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지나며, 곤명·곤양·서포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있어 농수산물 유통에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흥사리에 매향비, 송전리에 곤양향교·곤양읍성, 환덕리에 조씨고가가 있다. 성내리의 비자나무는 남해안지역에만 자생하는 희귀목이다.

성내(城內)·남문외(南門外)·서정(西鼎)·송전(松田)·대진(大津)·환덕(還德)·묵곡(默谷)·흥사(興士)·가화(加花)·검정(儉丁)·중항(中項)·무고(舞鼓)·맥사(脈社) 등 13개 리가 있다.

  1. 사남면(泗南面)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42.46㎢, 인구 1만 45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화전리이다. 본래 사천군 지역으로 상서면(上西面)이라 하여 유천(柳川)·월성(月城)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근남면(近南面)의 도동(道東)·병둔(兵屯)·화전(花田) 등 13개 리와 남양면의 3개 리, 하서면(下西面) 일부, 중남면(中南面) 일부를 합해 읍서면(邑西面)이라 하였다. 그러나 1931년 사남면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동쪽은 와룡산의 지맥이 뻗은 산지에서 발원하는 죽천이 면의 서북 방향을 지나 사천만으로 흘러들면서 주변에 선상지를 형성한다. 면의 중앙에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잎담배와 복숭아·포도 등의 과일을 재배한다. 그리고 소·돼지·닭·토끼 등을 사육한다. 교통은 진주∼사천 간의 국도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달리며, 초전·사남·사촌을 잇는 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난다.

문화유적은 화전리에 지석묘, 초전리·월성리·계양리에 고분, 월성리와 우천리에는 산성의 흔적이 많다. 그리고 우천리에는 천연숲이 있다.

화전(花田)·가천(佳川)·계양(界陽)·방지(芳芝)·사촌(沙村)·우천(牛川)·월성(月城)·유천(柳川)·종천(宗川)·죽천(竹川)·초전(草田) 등 11개 리가 있다.

  1. 서포면(西浦面)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48.06㎢, 인구 3,89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평리이다. 본래 곤양군 지역으로 서포면이라 하여 원동(院洞)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양포면(兩浦面)의 조도 등 10개 리와 동부면의 사동(仕洞) 일부를 합해 서포면으로 개편해 사천군에 편입되었다. 서포면은 북서쪽과 남동쪽으로 뻗친 긴 타원형을 이루며, 면의 절반 이상이 반도(半島)로서 사천만에 0000돌출해 있다. 반도 앞에는 토끼 모양의 비토도(飛兎島)가 가로놓여 천혜의 좋은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 밖에도 굴섬·월등도·진도·별학도(別鶴島)·송도(松島) 등 많은 유인도와 무인도가 있어 한려수도 특유의 풍광을 이룬다. 산지가 거의 없는 평지이며, 곤양강이 면의 동북부 경계를 지나 서포만으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잎담배 등과 복숭아·배·감 등의 과일류를 재배한다. 남해안에서 생산되는 굴은 옛날부터 궁중 진상품으로 알려졌고, 지금도 주민의 주된 소득원이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북서부를 지나며, 곤양∼서포 간 지방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선창에까지 이어진다. 또한 하동군 진교에서 서포에 이르는 도로가 있어 농수산물 유통에 편리하게 이용된다.

문화유적은 외구리에 작도정사(鵲島精舍)가 있다.

구평(舊坪)·구랑(九浪)·금진(金津)·내구(內鳩)·늑도(勒島)·신수(新樹)·다평(多坪)·비토(飛兎)·선전(仙田)·외구(外鳩)·조도(措道)·자혜(自惠) 등 12개 리가 있다.

  1. 용현면(龍見面)

시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27.85㎢, 인구 8,34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지리이다. 본래 사천군 지역으로 중남면(中南面)의 화계(花溪)·통양(通洋)·조금(助琴)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남면(下南面)의 금구 등 5개 리와 남양면(南陽面)의 대선(大禪) 일부를 병합해 읍남면(邑南面)이라 하여 12개 리로 개편되었다. 1931년 면의 동남쪽에 있는 와룡산이 보인다고 하여 용현면으로 개칭되었다. 전체적으로 사남면과 사천시의 중심부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은 사천만과 접하고 남쪽은 와룡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지를 이루고 있다. 이 산지에서 발원한 백천이 사천만으로 흘러들어 유역에 선상지가 발달해 면의 서부는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밀·콩 등이 있다. 특용작물로 잎담배 등과 과일류를 재배하고 백작약·적작약·일천궁 등의 약용작물 재배도 활발하다. 청정해역인 사천만에서는 선진리어장을 중심으로 모래무지·문어·전복 등의 어패류가 많이 산출된다. 남강댐 방류 이후 백합·굴·고막·바지락 등이 많이 잡힌다.

교통은 진주∼사천 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이 국도에서 신복∼선진으로 통하는 군도와 용치∼송지로 통하는 군도가 갈라진다.

문화유적은 선진리에 사천조명군총성, 덕곡리에 지석묘군 등이 있다.

송지(松旨)·선진(船津)·통양(通洋)·신촌(新村)·신복(新復)·온정(溫井)·용티(龍峙)·주문(朱文)·석계(石溪)·구월(龜月)·금문(琴聞)·덕곡(德谷) 등 12개 리가 있다.

  1. 정동면(正東面)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36.65㎢, 인구는 1만 148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곡리이다. 본래 사천군 지역으로 상주내면(上州內面)이라 하여 고읍(古邑)·동계(東溪)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면의 장전 등 8개 리와 군내면의 선인동 일부, 고성군 상리면의 가슬리 일부를 병합해 읍동면(邑東面)이라 하여 10개 리로 개편되었다. 1931년에 정동면으로 개칭되었다. 부봉산(浮蜂山)·안산(案山) 등 구릉성 산지가 많다. 고성군 상리면에서 발원한 하천이 면의 중앙을 서북류하며 그 유역에 평지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잎담배 등과 과일류 재배가 활발하고 약용작물인 적작약·백작약·일천궁도 생산한다.

교통은 면의 서부를 진주∼사천 간 국도가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사천과 고성을 잇는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남∼북서방향으로 지난다.

문화유적은 소곡리와 장산리에 고인돌, 화암리에 두음벌산성, 예수리에 성황당산성이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로는 풍정리에 효자제단과 풍정숲이 있다. 또한 장산리에는 임진왜란 공신인 주몽룡(朱夢龍)의 출생지인 대산(垈山) 등이 있다. 풍정리의 느티나무와 고읍리의 이팝나무는 노거목으로 유명하다.

대곡(大谷)·감곡(甘谷)·고읍(古邑)·소곡(所谷)·수청(洙淸)·예수(禮樹)·장산(獐山)·풍정(豊井)·학촌(鶴村)·화암(花巖) 등 10개 리가 있다.

  1. 축동면(杻洞面)

시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23.29㎢, 인구 1,91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길평리이다. 본래 진주군 지역으로 축동면이라 하여 예동(禮洞)·사다(士多)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차례면(加次禮面)의 하동(下洞)과 사천군 북면의 토촌동 일부, 진주군 부화곡면(夫火谷面)의 가산·학수 등 9개 리를 병합해 사천군에 편입되었다. 화당산(花堂山)·함박산 등 낮은 산이 있다. 면의 동남부에 길호강이 있고 그 지류가 흘러 유역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로 이용된다. 면의 서부 경계로 진양호 방수로(晋陽湖放水路)가 지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 등이다. 특용작물로 잎담배 등과 과일류를 재배한다. 특히 사다리에는 맥주맥시험장이 있어 맥주맥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남부를 동북∼서남 방향으로 통과하며, 진주시 내동면에서 탑리·길평·사천을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난다.

문화유적은 가산리의 조창 앞에 석장승이 있으며, 구호리에는 쾌재정이 있다.

길평(吉坪)·배춘(培春)·사다(士多)·탑(塔)·반룡(盤龍)·가산(駕山)·구호(舊湖) 등 7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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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8)
사천시(www.sa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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