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뒷산의 성황당산성(경상남도 기념물, 1993년 지정)과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주거지 주위나 산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견고하게 성벽을 쌓아 유사시에 적을 방어하기 위한 평산성이다.
사천읍성에 관한 문헌자료로는 먼저 조선왕조실록 문종조의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정본이 상계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사천읍성의 둘레는 3,015척이며 성벽의 높이는 평지가 11척 5촌이고 험한 곳이 10척 5촌이며 적대(敵臺)가 15개, 여장(女墻)이 580개, 성문(城門)은 셋인데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이 있고, 성안에는 우물이 일곱인데 못(垓字)은 아직 파지 않았다.”고 하여 그 규모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 《경상도속찬지리지 慶尙道續撰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는 “현성(縣城)은 을축년에 쌓았고 석축(石築)의 둘레는 3,015척이며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국창(軍倉)이 있고 샘과 우물 세 곳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성벽의 높이가 약간 높은 것은 증축이 가해졌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乙丑’은 축성연대로서 세종 27년(1445)에 해당된다.
또 이와는 달리 《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와 《사천읍지》 등의 기록에는 성읍의 규모 가운데 석축의 둘레를 모두 ‘5,015척’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앞의 조선왕조실록과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이는 ‘3,015척’의 오기이거나 조선 초기의 읍성에 증축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이상의 기록들에 따르면, 사천읍성은 초기 성축 규모에 추가하여 증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축조 연대도 1445년(세종 27)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천읍지여지승람 泗川邑誌輿地勝覽》 궁실조(宮室條)에 신석조(辛碩祖)가 쓴 〈객관기 客館記〉는 읍성에 관한 내력을 보다 소상히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사천의 향토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읍성의 축성 경위와 읍기의 이전, 현청의 규모와 승경, 그리고 수령의 치적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사천읍성은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당시 왜장 시마즈(島津義弘)군에 점령당하였다가 같은 해 9월 경상도병사(慶尙道兵使)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 휘하의 모국기(茅國器) 선봉군에 의하여 탈환된 혈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