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부원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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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부원동 유적 전경
김해 부원동 유적 전경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집터와 무덤 · 조개더미 관련 생활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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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집터와 무덤 · 조개더미 관련 생활유적.
개설

김해 봉황동패총의 동쪽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980년 4월 10일부터 약 4개월에 걸쳐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내용

유적은 남산 서쪽 기슭의 패총지역(A지구), 동쪽 삼정동과 경계하고 있는 패총지역(B지구), 그리고 동쪽의 민무늬토기 산포지역(C지구)으로 구분된다.

  1. A지구

A지구의 조가비는 능선의 경사도를 따라 비스듬히 퇴적되어 있었다. 기반층 위에 5층의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제Ⅰ층은 약 50㎝ 두께의 경작층(耕作層)이고, 제Ⅱ층은 약 20㎝ 두께의 순수 패각층이며, 제Ⅲ층은 조가비가 약간씩 섞인 흑갈색 부식토층(腐植土層)이고, 제Ⅳ층은 다시 40∼50㎝ 두께의 순수 조가비층이며, 제Ⅴ층은 생토층 바로 위로 50㎝ 두께의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차로 형성된 부식토층이다.

각 층위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은 서로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종류는 대체로 유사하다. 토기·철기·골각기(骨角器)·석기·탄화곡물(炭化穀物) 등이 출토되었다.

조가비층 아래의 바닥층에서는 집터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3기 모두 패총의 최하층인 제Ⅴ층의 부식토층에 조성되었으며, 원형의 움집터[竪穴住居址]·방형의 반움집터[半竪穴住居址]·주춧돌을 가진 장방형의 누각집자리[高床家屋址]로 구분된다. 그 중 제1호의 경우, 집터의 곁에 지하저장고가 있고 중앙에는 부엌을 두었으나, 나머지 제2호와 3호에는 없었다.

무덤은 돌널무덤〔石棺墓〕과 널무덤〔土壙墓〕이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제Ⅳ층의 조가비층에서, 널무덤은 최하층인 생토층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부장품으로는 회청색의 항아리토기〔壺形土器〕와 적갈색의 바리토기〔鉢形土器〕·붉은간토기〔紅陶〕가 발견되었다.

조가비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가 가장 많다. 색조에 따라 회청색과 적갈색, 소성도(燒成度)에 따라 경질(硬質)과 연질(軟質)로 구분되며, 경질이 다수 출토되었다. 종류는 항아리〔壺〕·독〔甕〕·바리〔鉢〕·굽그릇〔高杯〕·잔〔坏〕 등의 일반적인 토기와, 복어·쇠뿔모양의 이형토기(異形土器)와 말·성기(性器) 등의 토우(土偶)까지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적갈색과 회청색토기의 비율은 평균 2:1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적갈색토기의 비율이 높다. 또한 신라토기와 이단구연호형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경주와 일본 구주(九州) 지방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는 수적으로도 얼마되지 않지만 손칼〔刀子〕·화살촉〔鏃〕·창〔鉾〕·낚시바늘〔釣〕·송곳〔錐〕 등 주로 수렵이나 어로용의 생활용구였다.

골각기는 사슴뿔로 만든 칼자루〔刀子柄〕와 뼈로 만든 찌르개〔尖頭器〕·활촉·바늘, 산돼지의 이빨로 만든 장식품, 산돼지의 어깨뼈와 사슴뿔로 만든 점뼈〔卜骨〕 등이 발견되었다. 점뼈는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에서 발견된 것과 더불어 당시의 풍습을 알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 중국과 일본의 점뼈와도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석기는 숫돌〔砥石〕이 대부분이고 도끼〔斧〕·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도 출토되었다. 탄화곡물은 쌀·보리·밀·조·복숭아씨 등이 출토되었다. 쌀은 장폭비(長幅比) 1.61의 단립형(短粒形)이고, 보리는 쌀보리와 겉보리 두 종류가 있으며, 밀은 비교적 낟알이 굵고, 복숭아씨는 산복숭아와 같은 재래종이었다.

조가비층을 형성하고 있던 조가비는 해수산(海水産)인 굴을 비롯해 백합 등 30여 종에 달했으나 담수산(淡水産)은 한두 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가비와 함께 발견된 짐승뼈는 말·소·산돼지·사슴 등의 몸뼈와 이빨·뿔 등이었다. 그 중에는 점뼈·칼손잡이·장식품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손질한 것들도 있었다.

A지구 문화양상의 특징은 쌀·보리·밀 등을 주로 하는 농경생활을 하면서 인접한 해안가에서 조개를 채집해 먹고, 움집 또는 반움집 가옥에서 생활하면서 낙랑·일본 등의 다른 지역과의 문화교류가 빈번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시기는 원삼국시대 후기인 3~4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1. B지구

B지구는 남산 동쪽 기슭의 약간 고지에 위치해 있다. 퇴적층은 조가비층 위에 논밭과 일반무덤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교란돼 바닥층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조가비층은 길이 40m, 너비 4m 규모로 황갈색 생토층 위에는 5층의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맨 위의 제Ⅰ층은 부식토층, 제Ⅱ층은 조가비층, 제Ⅲ층은 황갈색 사질토층, 제Ⅳ층은 조가비층, 제Ⅴ층은 흑갈색 부식토층이었다. 그러나 황갈색 사질토층(제Ⅲ층) 위의 제Ⅰ층과 제Ⅱ층은 그 아래의 제Ⅳ층과 제Ⅴ층이 후대에 재퇴적된 교란층이었다.

별다른 생활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토기·골각기·석기·탄화미 등이 발견되었다. 유물 중 토기는 주로 제Ⅳ층과 제Ⅴ층에서 출토되었다. 특징은 회청색계통 토기와 적갈색계통 토기로 나눌 수 있었다. 회청색토기의 경우 연질계통의 것이 대부분이며, 적갈색토기도 민무늬토기의 특징을 닮은 모래흙의 연질토기가 많았다. 토기의 종류로는 항아리·독·잔·굽그릇·접시 등 단순한 것이었다.

그 밖에 가락바퀴〔紡錘車〕·그물추〔魚網錘〕·토옥(土玉) 등의 일반 생활용구와 쇠살촉〔鐵鏃〕·간돌칼〔磨製石劍〕 조각, 그리고 사슴뿔이나 그 뼈·이빨과 산돼지뼈나 그 이빨로 제작된 칼자루·찌르개·화살촉·장신구 등이 있다. 또한 장폭비 1.51의 단립형 탄화미도 나왔다.

B지구 주민들은 A지구보다 이른 시기인 1~2세기경의 농경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헌상에 보이는 가락국(駕洛國) 형성기에 해당되는 듯하다.

  1. C지구

C지구는 B지구에 인접된 경작지로 표토 아래 약 1.5m의 깊이에서 원형의 움집터 3기와 물고랑〔溝狀遺構〕이 발견되었다. 그 위의 퇴적층에서는 토기·철기·골각기·석기·탄화곡물 등이 발견되었다.

집터 3기는 중앙에 위치한 단면 V자형의 물고랑을 중심으로 그 좌측에는 제1호와 2호의 집터가 상·하 나란히, 우측에는 제3호 집터가 각각 위치해 있었다. 집터는 평면이 원형으로 서남쪽에 부엌을 두고 실내에 배수구를 배치한 반움집터이다. 제2호 집자리 내에서는 점뼈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C지구에서 발견된 집터는 모두 원형의 움집이다. 화덕자리의 위치는 서남쪽에 두었으나 홍수로 인해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 화덕자리의 위치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변진에서는 화덕을 집의 서쪽에 둔다.”는 기록과 상통하고 있어 주목된다.

유물 중 토기는 회청색 계통의 연질토기와 적갈색계통의 연질토기가 그 주류를 이룬다. 종류는 항아리·독·바리·굽그릇·이형토기 등으로 특징은 B지구 출토품과 같다. C지구 주민들이 B지구 퇴적층을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토기 외의 토제품으로는 가락바퀴와 그물추가 있다. 가락바퀴는 원판형(圓板形)과 산주형(算珠形)이 있다. 그물추는 구상(球狀)과 관상(管狀)의 두 종류가 있다.

철기는 주조쇠도끼〔鑄造鐵斧〕 1점이, 골각기는 칼자루·점뼈·골촉이, 석기는 홈자귀〔有溝石斧〕·갈돌〔碾石〕·돌도끼·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탄화곡물은 장폭비 1.73의 단립형 쌀과 팥껍질·머루씨앗 등 주로 가을철에 수확하는 내용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C지구의 주민도 B지구와 마찬가지로 1~2세기경에 이곳에 정착한 농경민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김해의 충적평야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기슭의 조개더미 및 집터 유적으로, 가락국 성립 초부터 중흥기까지 형성된 생활유적이다. 특히 A지구는 타날문토기에서 신라·가야토기에로의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하며, 이 과도기적 시기를 ‘부원동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문헌

『김해부원동유적』(동아대학교박물관, 1981)
집필자
심봉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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