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토기 ()

기마인물형 토기
기마인물형 토기
선사문화
개념
삼국시대 가야 소국들에서 제작, 사용된 낙동강 서쪽 일대에서 출토되는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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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가야 소국들에서 제작, 사용된 낙동강 서쪽 일대에서 출토되는 토기.
개설

가야토기는 신라토기와 함께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에서 발전하였다. 도차로 성형하여 1200°C 이상의 고온을 내는 등요(登窯)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 흙 속에 포함된 규산이 유리질화 되어 침수성이 없어진 회청색 경질토기가 주를 이룬다.

가야토기는 공간적으로는 가야산 이남의 낙동강 서쪽 지역에서 호남 동부 지역까지 주로 출토되며, 시간적으로는 회청색 경질토기 출현시기인 3세기 중엽 이후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제작된 토기를 가리킨다. 가야 소국들에서 사용된 토기는 크게 보아 회청색 경질토기와 적색 연질토기로 구성된다. 적색 연질토기는 전 시기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의 제작기술을 계승한 것으로 주로 생활유적에서 자비(煮沸)용기로 발견되고 있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분묘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는 점을 통해서 생활용기와 더불어 껴묻거리〔副葬品〕로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특징

가야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영토 규모가 작고 멸망할 때까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으나, 삼국시대 신라와 함께 가장 먼저 경질토기를 생산하였으며 여러 소국마다 형태가 다른 다양한 토기를 제작하였다.

가야토기는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의 토기 가운데 가장 조형미가 뛰어나며 그 유려한 곡선은 한국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같은 시대의 백제토기, 고구려토기가 기종과 형태가 비교적 단순한 점과 대비된다. 또한 다양한 기종과 상형토기를 제작한 신라토기도-특히 경주지역에서 제작된 토기의 경우- 다소 경직된 형태를 띤 점에서 비교가 된다.

더욱이 가야토기는 이를 제작하던 도공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스에키〔須惠器〕라는 토기를 창출하였다. 스에키를 계승한 오늘날 일본의 비젠야키〔備前燒〕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기(陶器)의 근원도 실은 가야토기에 연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회청색 경질토기는 김해시 양동리 제235호분 출토 두귀달린항아리〔兩耳附壺〕를 들 수 있다. 회청색 경질토기의 출현 시기는 고분 조영시기의 하한 연대가 2세기 후엽으로 보이는 양동리 제162호분을 기준으로 할 때, 그 다음 단계인 양동리 제235호분 출토품은 3세기 전엽으로 소급될 개연성이 높다. 또한 대성동 제29호분 출토품으로 볼 때 늦어도 3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동한(東漢)대의 회유도(灰釉陶)와 같은 중국 제도기술의 영향에 의해 영남지역 각지에서 와질토기 제작기술의 개량에 의해 자체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내용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는 영남지방을 관통하는 낙동강이라는 자연지리적 경계와 일치하여 주로 5세기 이후 그 양식적 차이가 뚜렷해진다. 낙동강 서쪽 지역은 가야양식 토기가 분포하고, 그 동쪽 지역은 신라양식 토기가 분포한다. 이와 같이 가야와 신라의 토기는 영남지방을 가야권과 신라권으로 구분해 주는 기준이 되며, 또한 가야권에서도 여러 세력권을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 되고 있다.

가야양식 토기는 지역차에 따라 소지역 양식으로 세분화된다. 크게 보아 4세기에는 김해 금관가야(金官加耶)양식, 함안 아라가야(阿羅加耶)양식, 5세기에는 아라가야양식, 고령 대가야(大加耶)양식, 고성 소가야(小加耶)양식으로 분류된다. 이 각 양식의 토기들은 한정된 하나의 분지를 넘어 여러 분지와 수계에 걸쳐 분포하는데, 이는 각각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라는 정치체의 권역에 대응한다.

4세기 초에 성립된 금관가야양식 토기는 화로모양그릇받침〔爐形器臺〕과 외절구연고배(外折口緣高杯), 격자타날호(格子打捺壺)가 특징적이다. 아라가야양식 토기도 같은 시기에 성립하며, 공(工)자형 굽다리접시, 화로모양그릇받침, 양이부승석문타날호(兩耳附繩蓆文打捺壺)가 특징적인데, 5세기에는 화염형투창고배(火焰形透窓高杯), 굽다리접시모양그릇받침〔高杯形器臺〕이 등장한다. 소가야양식 토기는 5세기 초에 성립하며, 삼각투창고배(三角透窓高杯),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 그릇받침이 특징이다. 대가야양식 토기도 5세기 전엽에 성립하며 유개식장경호(有蓋式長頸壺)와 세로띠 장식의 대형 통모양그릇받침〔筒形器臺〕가 특징적 기종이다.

시기별로 가야토기 양식의 분포를 보면, 4세기대 금관가야양식 토기는 옛 김해만을 중심으로 주변의 부산·진영·진해 일대에 국한된다. 반면, 아라가야양식 토기는 남강 하류 양안과 진동만 일대를 중심으로 남강, 황강수계와 낙동강 중·상류역, 남해안에 걸쳐 넓게 분포한다.

4세기대 토기의 뚜렷한 양식적 특징과 분포권을 형성한 정치체가 금관가야와 아라가야라이며, 그 가운데 아라가야양식 토기의 분포권으로 유추되는 광역 관계망은 아라가야가 금관가야와 함께 가야 전기의 양대 세력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세기 초 이후에는 금관가야양식 토기가 소멸하고 아라가야양식 토기의 분포가 축소되는 바, 이것은 고구려광개토왕의 남정(南征) 이후 특히 금관가야의 쇠퇴를 반영한다. 그 후 소가야양식 토기가 이전 시기의 아라가야양식 토기를 교체하듯 남해안과 황강유역, 남강 중·상류역까지 분포권을 확대한다. 이는 아라가야를 대신하여 남강수계와 남해안 일대에서 소가야가 짧은 기간이지만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대가야양식 토기는 5세기 중엽 이래 황강수계, 남강 중·상류역, 섬진강수계, 여수반도와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한다. 그것은 아라가야와 소가야가 활동하였던 전시기 황강, 남강 중·상류역과 섬진강 수계의 관계망을 고령의 대가야세력이 대신 장악함으로써, 4세기까지 내륙의 소국에 불과했던 대가야가 5세기 중엽 이후 가야 후기의 중심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의의와 평가

가야토기의 변천 모습을 통해서 가야사회의 발전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가야토기는 가야사 복원의 척도가 된다. 2∼3세기 가야는『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변한의 소국이 분립된 상태로 존재하는 소국단계였으나 4세기에는 금관가야와 동래 독로국(瀆盧國)이 연합하는 소국연합단계로 발전하였다. 5세기 전반에는 고성 소가야를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의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연합한 광역의 소국연합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는 소국연합의 규모가 확대된 것이었으나, 그 구성국 사이의 상하관계가 분명하게 형성되지 않은 단계였다. 5세기 후반 대가야는 호남 동부 지역에까지 권역을 확대하고, 그 권역내부에 지배-복속관계에 의한 영역지배가 관철된 점 등에서 초기국가단계로 파악된다. 합천 저포리유적 E지구 제4호분 출토 대가야양식 ‘하부(下部)명’ 짧은목항아리〔短頸壺〕와 ‘대왕(大王)명’ 토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후 6세기 후엽에 이르면, 고령·합천·의령 등지에서는 가야양식 토기가 신라양식 토기로 교체된다. 이는 문헌에 보이는 562년(혹은 561년) 대가야 멸망 기사와 일치하는 것으로, 가야지역의 신라영역화를 증명해주고 삼국시대 토기양식이 정치적 변동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참고문헌

『가야토기』(박천수, 진인진, 2010)
『가야, 잊혀진 이름 빛나는 유산』(김태식·박천수 외, 혜안, 2004)
『가야의 유적과 유물』(박천수·홍보식 외, 학연문화사, 2003)
『가야문화도록』(김세기·박천수 외, 경상북도, 1998)
「금관가야 토기의 표준형식과 연대」(박광춘,『호남고고학보』37, 2011)
「가야토기 양식 연구」(박승규, 동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신라·가야 토기양식의 생성」(이성주,『한국고고학보』7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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