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는 고대사회의 인간이 살았던 모든 형태의 주거지 유적이다.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인 집은 추위, 비, 바람, 맹수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중요한 건축물로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구석기시대에는 자연동굴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신석기시대에는 땅을 파서 만든 움집에 거주하며 농경과 정착생활을 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평야나 하천에 가까운 낮은 야산에 자리를 잡고 살았는데 세장방형이나 장방형의 움집 내부에서 기둥구멍, 화덕자리, 저장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 지상식의 집이 보편화되고 기와집이 등장하며 부뚜막과 구들을 이용하였다.
예로부터 인간 활동의 대부분은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옷, 음식과 함께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집은 추위, 비, 바람, 맹수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이와 같이 집은 인간 생활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고대사회의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집터〔住居址〕유적을 남겼으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하였다.
인간이 축조하여 생활하며 남긴 건축물인 집터는 당시 사회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자연 동굴에 주로 거주하였으나 신석기시대가 되면 농사를 짓기 위해 한 곳에 오래 정착하게 되면서 땅을 파서 지은 움집〔竪穴住居〕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하식의 움집은 원삼국시대까지 가장 일반적인 살림집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형태도 방형 · 장방형 · 원형 · 타원형 · 육각형 등 다양하였다. 이후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역사시대부터는 지상에 집을 축조하기 시작하며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집터는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다.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먹거리를 찾아 끊임없는 이동생활을 하게 되지만 빙하기의 추위와 비, 맹수를 피하기 위해 어떠한 형태로든지 집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구석기시대의 집터로는 동굴이나 바위그늘, 임시 야영지 등이 있다.
동굴집터는 대동강과 남한강 일대의 석회암지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덕천 승리산 동굴 유적, 평양 검은모루동굴 유적, 평양 용곡리 유적, 대현동 · 만달리, 제천 점말 용굴, 단양 금굴, 청원 두루봉, 공주 마암리 유적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동굴유적은 대부분 근처에 물이 흐르고 입구가 평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구석기인들은 이동생활 중 돌이나 나무를 이용하여 임시 야영지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전 용호동이나 장흥 신북 유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임시 야영지는 주로 강가나 호숫가에서 발견된다. 임시 야영지의 상부 구조는 집의 중심에 기둥을 세운 후 나뭇가지를 결구해 텐트식으로 만든 후, 그 위에 풀이나 작은 나뭇가지, 혹은 짐승의 가죽을 덮는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수렵 · 채집의 이동생활에서 점차 벗어나 농경을 기본으로 하는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과 바위그늘집〔岩蔭住居〕도 일부 이용하였지만 이제 땅을 파서 만든 움집에 거주하면서 농경과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동굴집터는 의주 미송리, 평양 용곡, 춘천 교동 유적 등지에서 발견되었으며, 바위그늘집터는 단양 상시리, 청도 오진리, 부산 율리, 금릉 송죽리, 제주 북촌리 유적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교동 유적은 다른 동굴유적과 달리 산의 경사면을 인공적으로 파고들어가 만든 것으로, 동굴 내부는 지름 4m 가량의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움집터는 대부분 큰 강이나 바닷가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지만 서울 암사동이나 하남 미사리 유적과 같이 강이나 바닷가의 모래땅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움집의 내부에서는 기둥구멍과 화덕자리가 발견되는데, 화덕자리는 집의 중앙에 위치한다. 신석기시대의 이른 단계에는 가장자리에 돌을 돌린 소위 위석식〔圍石式〕화덕자리가 유행하지만 중기 이후에는 바닥을 판 수혈식〔竪穴式〕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또한 움집에서는 계단이나 경사로를 이용한 출입시설과 항아리를 이용한 저장시설이 발견되기도 한다.
신석기시대 전기 움집의 평면은 원형이나 방형의 형태를 보이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 부산 동삼동 유적을 들 수 있다. 중기에 접어들면 움집의 평면형태도 다양화되고 마을의 수와 규모가 급증하게 되는데, 이러한 예로는 최근 조사된 인천 삼목도, 영종도 운서동, 시흥 능곡, 용인 능서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마을의 규모가 3∼5동 정도의 움집으로 구성되며, 서해안 일대에서는 대천리식 집터라 불리는 대형의 장방형 집터가 발견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에는 본격적인 농경생활과 더불어 크고 작은 마을이 평야나 하천에 가까운 낮은 야산에 집터가 자리 잡게 된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마을은 평택 소사동, 아산 명암리, 천안 백석동, 대전 둔산동 유적 등지에서 발견되는데, 움집의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나 장방형을 보인다. 움집 내부에서는 기둥구멍, 화덕자리, 저장시설 등이 발견되는데, 화덕은 바닥을 얕게 판 형태와 가장자리에 돌을 돌린 위석식이 대부분이다. 기둥구멍은 움의 긴 변에 평행하여 3∼4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배치로 보아 지붕은 맞배나 우진각지붕의 형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움집의 규모는 대부분 여러 세대가 거주하기에 적합한 30㎡ 이상을 보인다.
청동기시대 전기 이후에는 움집의 중앙부에 타원형의 구덩이를 얕게 파고 그 양쪽에 기둥을 세우는 소위 송국리식 집터가 유행하게 된다. 송국리식 집터의 평면은 원형이나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집의 규모는 단독 세대가 거주하기에 적합한 20㎡ 내외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송국리식 집터는 금강유역에서 발생해 점차 남부지방으로 확산되고, 일본 북큐슈〔北九州〕지역까지 전파된다.
송국리식 집터 단계에 이르면 마을 내와 마을 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부여 송국리 유적과 같이 수 백기 이상의 집터가 목책〔木柵〕으로 둘러싸인 대규모의 마을이 발견되는데, 이는 인구 증가에 따른 마을의 대형화와 마을 간의 정치 ·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는 증거이다. 또한 마을 간의 기능적 분화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천안 대흥리 유적에서는 수많은 저장시설이 발견되고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석기 제작용 전문 공방터〔工房址〕가 대규모로 확인된다. 이외에도 마을에서는 방어와 경계용 목적의 환호〔環濠〕, 광장, 의례 공간, 동물을 잡기 위한 함정, 창고나 망루용의 고상가옥 등이 활발히 발견되어 복잡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철기시대 집터의 평면형태는 북부지역에서 장방형이, 남부지역에서 타원형과 방형이 주류를 이룬다. 집터 내부에서는 무시설형과 위석형의 화덕이 시설되며 영변 세죽리, 사천 늑도 유적에서는 벽면을 따라 돌로 축조한 터널형의 구들이 새로이 발견된다. 집터의 규모는 80㎡의 초대형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20㎡ 미만의 소형이며, 강릉 방동리, 안성 반제리, 합천 영창리 유적에서는 다중 환호 및 목책이 집터와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남양주 수석리, 보령 교성리, 반제리 유적 등 일부 유적은 해발 100m 이상의 고지에 입지하고 있는데, 이는 이 시기 사람들의 사회조직과 생계방식이 송국리형 문화와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원삼국시대의 한반도에는 초기 고구려, 부여, 옥저와 읍루, 낙랑과 대방, 마한, 진한, 변한 등 수 많은 정치체가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집터 또한 정치체와 지역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낮은 구릉이나 강변의 충적지에서 발견되는 원삼국시대의 마을은 전 시기에 비해 더욱 복잡해지고 마을 간의 차이도 더욱 증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대전 용계동, 익산 사덕 유적에서는 수 백기에 이르는 집터와 함께 대규모의 저장시설이나 토기 가마 등이 발견된다. 또한 화재로 폐기된 집터 들이 다수 발견되어 당시 마을이나 정치체 간의 갈등과 전쟁을 시사한다.
중부 지역 원삼국시대 움집에는 여(呂)자 혹은 철(凸)자형의 출입시설이 딸려 있고 바닥에 돌을 깔고 점토띠를 두른 화덕이나 다양한 형태의 외줄 구들이 발견된다. 이에 비해 마한의 고지인 중 · 서남부 지역 움집은 평면이 원형이나 방형이고 내부에는 부뚜막과 외줄 구들이 설치된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내부에 네 개의 기둥이 설치된 4주식 움집이 유행한다. 마지막으로 변 · 진한의 고지인 동남부지역에서는 방형과 원형의 움집터가 발견되는데, ‘ㄷ’자형이나 곡선형의 외줄 구들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원삼국시대의 마을에서는 환호와 같은 방어 시설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마을 유적으로는 양산 평산리, 대구 달성, 김해 봉황대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철기나 유리구슬을 생산한 전문 공방터도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화성 기안리, 연천 삼곶리,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는 단야로, 송풍구, 거푸집, 모룻돌, 철괴 등이 확인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 움집도 여전히 축조되지만 평지에 지상식의 집이 보편화되고 기와집이 등장한다. 집터의 부뚜막과 구들의 축조 재료는 점토가 주류를 이루지만 백제 지역에서는 판석재를 이용한 화덕이 본격적으로 이용된다.
백제 지역의 한강유역에서는 평면 6각형의 움집과 기와집이 등장하고, 웅진기와 사비기에 이르면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소위 벽주〔壁柱〕건물이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지상 건물은 백제의 지배층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이해되는데, 예를 들어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는 대형의 벽주 건물들을 둘러싸고 목책이 설치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광주 동림동과 같은 유적에서는 100기 이상의 움집터와 60기 이상의 고상 건물들이 함께 발견되어 백제 취락의 대규모화와 다양화를 보여준다.
신라와 가야 지역의 경산 임당, 대구 시지동, 진주 평거동 등지의 유적에서는 수 백동의 집터로 구성된 대규모의 마을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마을에서는 방형과 원형의 움집이 발견되고, 내부에는 외줄 구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움집 벽을 따라 기둥 구멍이 다수 설치되어 있다. 또한 움집과 함께 고상건물이 활발하게 확인되었는데, 대구 시지동 유적에서는 도로 시설도 함께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집터는 조사의 부진으로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백제, 신라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선사 및 고대 사회의 집터는 당시 사회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집터는 구석기시대의 동굴, 신석기시대 이래 다양한 형태의 움집, 삼국시대의 벽주와 고상 건물로 그 양식이 발전해왔다. 이러한 시기별 집터의 입지, 규모와 특성을 분석하여 그 당시의 거주생활, 마을의 규모, 방어시설의 유무, 정치체 간 갈등과 전쟁 등 과거 인간이 살아왔던 모든 자취를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