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대평리 유적 ( )

진주 대평리 유적
진주 대평리 유적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무덤군 · 경작지 관련 마을터. 취락유적.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무덤군 · 경작지 관련 마을터. 취락유적.
개설

진주 대평리유적은 1967년 진양댐을 건설한 후, 경지정리공사 등으로 유적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많은 유물이 노출되어 학계에 알려졌다. 1975∼1980년 4차례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여 고인돌ㆍ돌널무덤 등의 청동기시대 무덤과 집터를 조사하였다. 이 후 1995~1999년에 진양댐의 수위를 높이는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외 6개 기관이 연합으로 9구역의 옥방지구와 2구역의 어은지구를 발굴하였다.

옥방1지구는 옥방유적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환호ㆍ집자리ㆍ경작지ㆍ무덤ㆍ고상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2지구는 옥방유적의 남쪽에 위치하며, 30여 기의 집자리와 무덤 31기와 함께 대규모의 밭을 조사하였다. 3지구는 옥방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0여 기의 집자리와 도랑 등을 발굴하였다. 4지구는 옥방유적의 서쪽에 위치하며, 환호와 60여 기의 집자리ㆍ무덤ㆍ밭 등을 조사하였다. 5지구는 4지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500여 기의 집자리와 밭ㆍ무덤 등을 조사하였다. 6지구는 4지구의 남쪽에 위치하며, 청동기시대부터 근대시기까지의 경작지가 중첩되어 있었다. 7지구는 1지구의 남쪽에 위치하며, 20여 기의 집자리ㆍ이중환호ㆍ무덤 등을 조사하였다. 8지구는 집자리ㆍ야외노지ㆍ밭ㆍ무덤 등을 조사하였다. 9지구는 2지구와 3지구 사이에 위치하며, 10여 기의 집자리와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4개 층의 중첩된 경작지를 조사하였다.

어은1지구는 16,000평을 조사하였는데, 신석기시대 노지 6기, 청동기시대 집자리 120기, 돌무지유구 25기, 구덩유구 27기, 무덤 17기, 야외노지 38기, 밭 4,000여 평을 조사하였다. 어은2지구는 약 8,000여 평에 해당하는 대지로 남강댐 수몰지역내 대평지구 중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하며,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50기과 구덩유규 32기, 돌무지 42기, 야외노지 33기, 돌넘무덤 8기, 고인돌 2기, 그리고 밭터를 조사하였다.

내용

발굴조사 결과, 대평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에 걸쳐 형성된 대규모 취락유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거지로 구성된 단순한 취락유적이 아닌 복합적인 취락 유적으로서 계급적인 분화를 보여주는 무덤군, 생산유적인 대규모 경작지, 다중환호(多重環濠)와 같은 거대한 공공시설물 등이 동시에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대체로 장방형과 방형을 띠고 있다. 이들 주거지에서는 대개 노지가 한 두 개씩 발견되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으며, 타원형의 작업공을 가진 주거지도 있다. 이 가운데 길이 12m 이상 되는 대형 장방형 주거지들은 노지를 2개 이상 갖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일반주거용이라기보다는 공공집회소나 공동작업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취락의 내부구조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는 어은1지구에서는 당시의 자연제방상에 타원형으로 주거지가 배치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어은2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들이 2열로 나란히 배치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들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나 겹아가리〔二重口緣〕에 단사선(短斜線)이 들어간 옹형토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전기의 장방형이나 방형에서 말각방형을 거쳐 중기가 되면 원형이나 타원형의 형태로 변하였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중기의 주거지에서는 대형 장방형 주거지가 자취를 감추고 중앙에 타원형의 작업공이 있는 소위 휴암리형(休岩里型) 혹은 송국리형(松菊里型) 주거지라 불리는 말각 방형이나 원형 주거지들이 주류를 이룬다. 타원형의 작업공에서는 숫돌, 미완성의 석기나 석재·박편 등이 자주 발견되어 석기의 제작이나 가공과 관련된 시설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중기에 들어서면 기둥구멍의 배치도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기둥구멍은 타원형의 작업공 양끝에 깊게 설치되어 있다. 중기의 집터에서는 송국리형의 무문토기와 함께 홈자귀〔有溝石斧〕나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등 중기 단계의 대표적 유물들이 출토된다. 특정시설물이나 공간 등의 주위에 깊은 도랑를 파서 포위하는 환호는 옥방 4지구에서 조사되었다. 이곳 환호는 강변으로부터 2줄이 나란히 충적대지 안쪽으로 굴착된 이중환호(二重環濠)이다. 동쪽편의 취락을 포위하는 듯 약간 휘어지면서 북동쪽을 향해 뻗어 있으며, 길이 120m 정도까지 확인하였다. 내외 환호 사이의 간격은 2∼5m 가량 된다. 두 환호 모두 단면은 ‘V’자형이며, 폭 2∼3m, 깊이 150㎝ 정도 된다. 옥방1지구에서는 모두 3줄의 환호를 발견하였다.

대평리유적의 두 지점에서 발견한 이중환호는 방어시설로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환호취락 내부에 취락의 공동저장시설로 추측되는 타원형ㆍ부정형 저장구덩이를 따로 구획하기 위해 방형의 도랑(溝)을 따로 굴착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도랑을 파서 구획하는 행위가 여러 가지 목적과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대평리유적의 각 구역에서 발굴된 취락 안에서는 주거지 이외에 공동취사시설로 추정되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페기물을 버리기 위한 구덩이들, 돌무지유구〔積石遺構〕들을 조사하였다. 그 중 돌무지유구는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은 것도 있지만, 돌무지만 남아 있는 것도 발견된다. 이들 돌무지에서는 석기를 제작하기 위해 운반되어온 석재라든가 미완성 석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일종에 공동석기제작소로 추측한다.

대평리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경작지로서 밭이 조사되었는데, 밭은 당시의 자연제방 안쪽에 침식으로부터 보호되는 배후지(背後地)에서 주로 확인된다. 오랜 세월이 경과했는데도 밭의 고랑과 이랑이 교란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어은1지구에서 하천의 흐름과는 직교하게 고랑과 이랑이 파여져 있는 밭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밭과 밭의 경계가 확인되지 않은 채 매우 길쭉한 범위에서 노출하였다. 고랑과 이랑은 각이 없이 물결모양으로 이어지며, 고랑의 폭은 35cm 내외, 이랑의 폭은 50cm 내외이다. 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도랑을 파놓은 흔적이 있다. 경작지 이곳저곳에서는 구멍무늬토기를 비롯한 무문토기와 석부, 석도들만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 경작지임이 분명하다. 옥방지구에서도 넓은 면적에서 청동기시대 밭이 확인되었다. 대평리 유적에서 발견된 곡물들은 여러 종류로 구분된다. 조〔粟〕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쌀, 기장과 함께 콩과식물도 채집하였다.

대평리유적에서는 무덤이 취락의 주변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약간 떨어진 곳에 무리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무덤의 형식은 돌널무덤과 고인돌로 나뉜다. 돌널무덤은 판자돌을 세워 네 벽을 만들고 바닥에도 판자돌을 깔고 뚜껑을 덮기도 한다. 돌널무덤은 고인돌에 비해 유물이 적거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 소형이기 때문에 성인을 펴서 묻는 경우는 적었을 것이다. 돌널무덤은 고인돌 주변에서도 발견되지만, 취락의 주변이나 경작지 근처에서도 드물게 존재한다. 고인돌은 지하 구덩이에 냇돌을 층층이 쌓아 돌널을 만들고, 다시 일정한 범위에 냇돌을 몇 겹 깔아 무덤구역을 만든 뒤에 상석을 얹어 놓았다. 간혹 돌덧널에 뚜껑돌을 나란히 덮은 것도 있지만, 상석 자체가 뚜껑돌 역할을 하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돌덧널안에서는 보통 벽옥제관옥(璧玉製管玉)ㆍ마제석검ㆍ돌화살촉ㆍ가락바퀴ㆍ홍도 등을 출토하였다. 돌무지시설에서도 무문토기나 석기들이 군데군데 발견되었다. 돌무지로 구획된 무덤구역에 가까이에서 작은 돌널무덤이 발견된 예가 많다.

특징

옥방 1ㆍ7지구에서는 도랑으로 구획된 특이한 건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환호 역시 특정 지구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전체 유적 내에서 중심과 주변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지구의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집자리는 그보다 북쪽인 어은 1지구와 연결되는 것으로 매우 지역적인 한정성을 보인다. 그러나 대평리유적에서는 집자리 외에 밭, 구덩유구, 무덤 등이 전 지구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유구들로 보아 이 유적은 당시의 도시에 해당될 만한 규모였을 것이다. 한편 대평리 유적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특징은 대부분이 매장시설인 돌널이나 돌덧널 주위에 방형(方形)이나 원형(圓形)에 가까운 돌무지시설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돌널무덤의 경우에는 생활공간과 사후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편이다. 고인돌은 돌널무덤보다 규모를 크게 축조하고, 고인돌 주변에 딸린무덤의 형태로 돌널무덤이 발견되기 때문에 고인돌이 상위의 형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돌널무덤은 고인돌의 하부구조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상호관계는 일률적이지 않다.

의의와 평가

진주 대평리 유적은 신석기 시대에서 삼국 시대 까지의 시기의 유적들이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ㆍ옹관묘 등을 포함하여 청동기시대 주거지ㆍ고인돌ㆍ돌널무덤ㆍ환호ㆍ밭유적, 그리고 조선시대 밭유적까지 확인되어 고대 사회의 생활상 중 여러 부분이 밝혀졌다. 특히, 진주 대평리 유적은 강안대지를 따라 광범위하게 노출된 대규모의 청동기시대 농경지ㆍ환호 취락ㆍ고인돌ㆍ돌널무덤 등은 한국 청동기시대의 사회사를 연구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얻어졌다.

참고문헌

『진주 대평리 옥방5지구 선사유적』(선문대학교, 2001)
『남강선사문화세미나요지』(동아대학교 박물관, 1999)
『남강유역 문화유적발굴도록』(동아대학교박물관·경상남도, 1999)
『진주 대평리 옥방2지구 선사유적』(경상대학교박물관, 1999)
『남강 선사유적』(남강유적발굴조사단·경상남도, 1998)
『남강댐 수몰지구의 발굴성과』(영남고고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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