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문암리 유적은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죽왕면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터, 널무덤 등이 발굴된 복합유적이다. 동해안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5,000년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어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하나이다.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널무덤 1기, 밭이 확인되었고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 등이 나왔다. 동아시아 최초로 신석기시대의 농경 유적인 밭이 발굴되었으며, 옥 모양 귀걸이인 결상이식(?狀耳飾)이 최초로 발굴조사 된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200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가 1991년부터 추진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도에 실시한 고성군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 지대 남쪽사면의 사구(沙丘) 지대에 위치한다. 유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해안에 면해 있는 해발 41.9m의 야산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고, 남 · 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문암천(文岩川)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으로는 약 400m 거리에 동해안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선사인들의 생활 근거지로서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1998년 12월 2일부터 1999년 3월 31일까지 유적의 정확한 성격과 분포범위, 층위와 형성과정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5개의 유물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서기전 6,000~3,000년)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노지(野外爐址) 등 다양한 유구도 발견되었다.
2차 조사는 2002년 10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다. 2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住居址) 3기(基), 매장유구(埋葬遺構) 1기 등 8기의 유구(遺構)와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 융기문토기), 결상이식(玦狀耳飾 : 옥 귀걸이)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3차 조사는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실시되었고, 추가 정밀발굴조사가 2011년 7월 14일부터 2012년 7월 31년까지 진행되었다. 3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耕作遺構)인 ‘밭’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밭 유구’는 ‘동아시아 최초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농경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밭과 함께 경작과 관련된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괭이 · 뒤지개 · 보습 · 갈판 · 갈돌 등이 있고, 탄화곡물로는 조와 기장이 있다.
토기와 석기 등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안정된 층위에서 뚜렷한 층서를 갖고 출토되었다. 그동안 층위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토기 편년(編年)을 보완할 수 있는 등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유적은 크게 신석기시대 조기(早期)와 중기(中期)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 조기는 다시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전형적인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문화층(Ⅷ층~Ⅵ층)과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만 출토되는 문화층(Ⅹ층과 Ⅸ층)으로 나누어진다. 각 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 유적의 시기는 3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1단계는 무문양토기만 출토되는 단계이다. 기형(器形)는 발형(鉢形)이다. 내 · 외면은 긁기와 물손질로 정면처리하였고, 태토(胎土)는 석영과 장석이 다량 함유된 사질토를 사용하였다. 제작기법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가 출현하여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단계이다. 융기문토기는 Ⅷ층~Ⅵ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이며, 구연(口緣)은 직립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점토띠를 수평 방식으로 붙여 쌓아 올렸다. 문양은 횡융기문(橫隆起文), 횡융기문+삼각융기문(三角隆起文), 횡융기문+종융기문(縱隆起文), 종융기문 등 다양하다. 이와 함께 오산리식토기도 Ⅷ층에서부터 전 층에 걸쳐 고루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 · 옹형 · 접시형 등 다양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3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는 줄어들고,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가 출현하는 단계이다. 문양은 단사선문(短斜線文)+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 · 능문(菱文) · 삼각문(三角文) · 횡주어골문 · 격자문(格子文) 등 다양하다. 이런 토기는 동해안지역에서 문암리유적 외에도 오산리유적, 지경리유적, 가평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이런 토기의 변화단계로 보아 양양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유사하거나 좀 더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오산리식토기 보다 이른 시기의 순수무문양토기 문화층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오산리유적은 층위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1호 집터 등 제1문화층에서 채집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결과, 대부분이 서기전 5,000년~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5,000년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어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유물로 매장유구에서 출토된 결상이식(玦狀耳飾)이 가장 주목된다. 결상이식은 청도 사촌리유적과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바가 있었으나 발굴조사된 유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시기상으로는 기원전 5,000년 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발견된 경작유구인 밭의 하층에서 채취한 토양(모래)에 대한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연대측정 결과가 약 5,000년 전(5,000±700 B.P.)이라는 연대가 검출되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규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까지 발굴조사에서 5개의 유물포함층과 당시의 생활면을 비롯한 3개의 문화층을 비롯하여 주거지 3기, 야외노지 3기, 목탄 및 소토유구 2기, 경작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住居址)의 평면 형태는 원형 · 말각장방형 · 장타원형 등 다양한 편이다. 규모도 다양한데, 크기가 대체로 4m 내외이다. 이 중에서 02-7호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770㎝, 너비가 450㎝를 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오산리 등 주변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주거지의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한 경우(98-1호, 02-1호 · 5호 · 7호)와 모래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98-2호)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주거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노지는 바닥면을 얕게 파고 주위를 할석으로 돌려 만들었고, 내부에는 목탄층이 퇴적되었다. 노지의 평면 형태는 원형 혹은 장방형이고, 노지의 지름은 1m 내외이다. 또한 주거지 외부에서도 야외노지 6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4기는 돌을 돌린 형식이고, 2기는 아무런 시설없는 무시설식으로 재만 남아 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원형 · 부정형 · 말각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수혈(竪穴)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혈의 깊이는 얕고,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02-8호 수혈의 규모는 길이 174㎝, 너비 92㎝, 깊이 14㎝를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 석부(石斧) 7점과 석영제 박편(薄片)과 함께 결합식 낚시바늘이 37점이 출토되어 석기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매장유구는 추정 길이가 150㎝이고, 너비는 84㎝이며, 깊이는 12㎝인 말각장방형 토광묘(土壙墓)로 추정된다. 부장품으로 귀에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상이식 1쌍을 포함하여 양 어깨 위치에 놓인 석부 2점과 머리맡의 소형 발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2012년도 제3차 발굴조사에서는 경작(耕作) 유구인 ‘밭’이 상 · 하 2개 층에서 확인되었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 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랑의 규모는 평균 길이는 970㎝, 두둑 너비는 3882cm, 고랑 너비는 4090cm, 고랑 높이는 15~17cm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밭의 일부를 파고 조성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 내부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서기전 3,600년~서기전 3,000년)의 짧은 빗금무늬토기편 ·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밭의 조성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그간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유물(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과 탄화곡물(조, 기장)이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암리유적은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매장유구 1기, 경작유구(밭)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조기의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 등 다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밭은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 탄화곡물(조, 기장) 그리고 곡물 토기압흔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암리유적은 기존에 동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오산리유적과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토기의 바닥면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남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 토기제작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밭유구는 청동기시대의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밭유적은 아직까지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된 바 없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