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미사리 유적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신석기시대에서 백제시대에 이르는 집터·토기류·고상식건물 관련 생활유적이다.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조사를 통해 청동기, 초기철기, 백제시대 걸쳐 형성된 취락유적임이 밝혀졌다. 충적평야가 발달한 한강 중류에 위치한다. 청동기 시대 바람을 막는 책렬유구(柵列遺溝)와 백제시대 대규모 밭이 국내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특히 이 밭은 백제시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생산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한강하류 유역 취락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197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0년에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래 암사동 유적과 더불어 한강 유역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알려졌으나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에서 백제초기에 걸친 생활유적이 층위를 달리하면서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유적은 1960년 김원용(金元龍)에 의해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래로 수차에 걸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80년에는 사적지 일대에 대한 긴급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만 알려져 오던 미사리유적이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유적 일대의 강류 폭을 확장하여 강 안을 정비하고자 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이곳 일대가 하천으로 편입되어 유적이 멸실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미사리선사유적발굴조사단’이 구성되어 유적에 대한 구제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는 1987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이 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초기 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취락지와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1992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백제시대의 밭이 대규모로 발굴되었고, 이러한 조사 성과에 힘입어 멸실 위기에 처해 있던 유적의 대부분이 보존되게 되었다.
미사리 유적은 원래 한강 중류에 위치한 하중도(河中島)로 원래 섬의 서쪽은 한강 본류가 흐르고 동쪽은 지류가 흘렀으나, 동쪽의 지류는 서울올림픽 조정경기장의 건설로 현재는 완전히 막혀 버렸다. 미사리 섬의 크기는 남북 4km, 동서 1.5km 가량 된다.
유적이 있는 한강 중류 일대는 강안을 따라 해발 50m 내외의 나지막한 야산 또는 구릉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들 구릉과 야산 사이에는 주변 화강암 산지의 풍화토가 퇴적되어 형성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많은 유적이 확인 · 조사되고 있다.
미사리유적 일대의 퇴적층의 구성은 하부의 자갈층과 상부의 모래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부의 자갈층은 한강의 수면으로부터 2∼3m 깊이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기반암을 부정합적으로 피복(被覆)하고 있으며, 수면 상부로도 약 10m 높이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자갈층은 하성퇴적층(河性堆積層)으로 75% 이상이 자갈로 구성되어 있다.
상류 쪽은 자갈층의 두께가 7m 가량 되고 자갈의 크기도 4∼6cm 가량 되는데 비해 하류 쪽은 자갈층의 두께가 10m 이상까지 두꺼워지고 있으며, 자갈의 크기도 8∼10cm 정도로 커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자갈층의 상부는 모래층이 퇴적되어 있는데, 표고 20m 내외의 높이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래층은 대체로 중립의 모래가 우세하며 느슨한 구조로서 지하수의 침투가 용이하여 건조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모래층의 두께는 지점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나 자갈층이 두꺼운 하류쪽은 6m 가량 되고, 자갈층이 얇은 상류쪽은 9m 가량 된다.
유구가 출토되는 지점은 자갈로 구성되어 있는 단구퇴적층을 덮고 있는 모래층 상부인데, 해발고도 17.5m에서 20.5m에 이르는 범위에 해당된다. 유구가 확인되는 지점의 퇴적층은 주로 중립이나 세립의 모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모래층 사이사이에 사질점토층이 끼어 있다.
또한 이들 모래층의 입자는 위로 갈수록 입자가 고와지는 경향이 있으며, 모래층과 사질점토층이 반복되는 점으로 보아 홍수로 인한 범람퇴적층임을 알 수 있다. 유구가 확인되는 지점의 층위는 A · B지구가 대체로 같으나, 유구가 나타나는 지점에 있어서의 층위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A지구의 층위는 남북방향으로는 변화가 거의 없이 일정하나 강쪽인 동쪽에서 섬 내부인 서쪽으로 가면서 새로운 퇴적층이 형성되며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A지구 발굴지역의 층위는 표토에서 자갈층에 이르기까지 모두 17개의 자연층위로 구분되며, 이 중 유구가 존재하는 문화층은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 문화층(Ⅷ층)과 신석기시대 상층(Ⅸ층) 및 신석기시대 하층(Ⅹ층)의 세 개가 확인되었다.
북쪽의 B지구의 층위도 기본적으로 수평을 이루고 있으나, A지구에 비해서 2m 가량 높다. 또한 B지구에서도 북동쪽에서 남서쪽의 방향으로 약간 경사져 있으나 경사도는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다.
B지점은 현 지표 밑의 약 4m 지점에서 자갈층이 노출되었으며, 현 표토층에서부터 모두 21개의 자연층위를 이루고 있다. B지구의 문화층은 신석기시대 문화층(Ⅸ, Ⅹ층)과 백제 하층(Ⅵ층), 백제 상층(Ⅴ층)의 세 개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는 황갈색점토층과 사질점토층에 형성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주변보다 높은 지점에 유구가 조영된 관계로 많은 침식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지면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노지 뿐이다.
노지는 지름 1m 내외의 소형 원형노지와 지름 2m 내외의 대형 야외노지가 있다. 비록 완전한 형태의 주거지가 확인되지는 않으나 미사리 신석기시대와 비슷한 시기의 유적인 암사동(岩寺洞) 유적을 통해서 볼 때, 미사리유적은 소형 원형노지를 중심으로 원형주거지가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는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신석기시대 제1기는 단단한 점토층에 형성되어 있으며, 주로 서울대 A지구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유구는 직경 30m의 범위에 분포하고 있고, 야외노지 2기를 중심으로 8기의 주거지(원형노지)가 축조되어 있다. 제1기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와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의 연대를 통해 볼 때, 서기전 4000∼3500년경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 제2기는 이보다 북쪽인 숭실대 A지구와 한양대 및 경희대 조사구간에서 확인되었으며, 밝은 갈색의 사질토층에 유구가 축조되어 있다. 제2기는 2기의 원형노지와 20여 기의 주거지(원형노지)가 조사되었으나, 이들은 일정한 정형성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지는 않다. 제2기의 연대는 점토질의 서해안 도서지방 양식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 후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는 A지구 전역에 걸쳐서 백제시대의 유구와 동일면에서 확인되며, 수혈주거지와 수혈식 저장공, 고상식건물과 책렬유구(柵列遺構) 등이 있다.
수혈주거지는 평면형태에 따라 방형과 장방형으로 나누어지며, 장방형주거지는 장축비가 2.0 이상이고 장축 길이가 10m 이상인 세장형의 대형주거지와 장축비가 2.5 이하이고 장축이 10m 미만인 소형 주거지로 세분할 수 있다.
방형주거지는 한 변의 길이가 5m 이상 되는 대형이고 주거지 내부에는 판석을 깔고 돌을 돌린 형태의 노지가 1∼2기 설치되어 있다. 방형주거지에서는 이른바 돌대각목문토기(突帶刻目文土器)라 불리는 특징적인 토기가 출토되는데, 태토(바탕흙)는 운모가 혼입된 사질이며 포탄형의 기형에 둥근 바닥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장방형주거지는 두 유형 모두 내부에 특별한 시설이 없이 땅을 약간 파고 불을 피운 간단한 형태의 노지가 설치되어 있으며, 공열토기와 적색마연토기 원저호 및 고배, 그리고 흑갈색 마연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두 가지 유형의 장방형주거지는 중복관계가 확인된 예도 없고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별다른 시기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유물조합상이 흔암리(欣岩里)유적과 비슷하기 때문에 대략 서기전 6∼4세기경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방형주거지는 공열토기가 출토되는 저장공에 의해서 파괴된 예가 있으며, 출토된 토기가 문양 요소만을 제외하면 태토나 기형에 있어서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하고, 이러한 토기편이 공열토기가 출토되는 장방형 주거지에 흘러들어간 예가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장방형주거지 보다는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책렬유구(柵列遺溝)는 미사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주거 집락 북쪽의 강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어 강한 바람의 흐름을 제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서기전 700년을 전후한 시기에서 서기전 3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초기철기시대는 주거지와 저장공 · 고상식건물이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평면형태에 따라서 (타)원형과 장방형, 방형, 凸형, 呂형의 네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타)원형의 경우는 지름이 3m 안팎이다.
장방형과 방형 주거지는 별도의 출입구 시설이 없고 내부에는 납작한 강돌을 깔아서 만든 노지(爐址)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중 고려대 박물관의 88-1호주거지에는 화덕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凸형주거지는 (장)방형주거지 남쪽에 출입구가 부가된 형태인데 내부에는 납작한 자갈을 깐 노지가 설치되어 있고, 화덕이 함께 설치된 예도 있다.
呂형주거지는 (장)방형주거지에 별도의 방형 출입구가 부가된 형태로 1기가 조사되었다. 내부에는 자갈을 깐 노지와 함께 원시적인 형태의 온돌구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주거지의 규모나 구조가 특이하고 내부에서 방제경(倣製鏡)이 출토된 점 등으로 보아 특수한 신분의 소유자가 거주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장)방형주거지에서는 이른바 주로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만이 출토되는 반면, 凸형주거지와 呂형주거지에서는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장(방)형주거지가 이들보다 먼저 출현한 형태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한편, 이들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경질무문토기 외반구연호의 연대를 통해 볼 때, 대략 서기전 1∼2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는 직경 50m 가량되는 범위에 수혈식 저장공과 고상식 건물이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앞선 시기보다는 정형화된 주거배치를 보이고 있다.
백제시대 주거지는 A지구 남쪽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사구간과 B지구 전역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으며, A지구의 경우는 청동기시대 및 원삼국시대 주거지와 동일면에 배치되어 있고, B지구의 경우는 3개의 서로 다른 층서를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
백제시대 유구로는 수혈주거지와 저장공, 고상식건물과, 부정형의 도랑유구, 그리고 밭이 있다. 수혈주거지는 평면형태에 따라서 (타)원형, 말각장방형, 육각형 등으로 구분되는데, (타)원형주거지는 주로 A지구에 분포하고 있다.
주거지 내부에는 대부분 정형화된 화덕이 주거지 북동벽에 설치되어 있으며, 일부 주거지에서는 기둥구멍도 잘 남아 있어서 이전 시기에 비해 발달된 구조를 보여준다. 말각장방형의 경우는 남쪽으로 방형의 출입구가 부가된 예가 있고, 육각형의 주거지에도 별도의 방형 출입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육각형주거지의 경우 주거지의 규모도 크고 벼루와 같은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서 특수한 집단이 거주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원삼국시대의 凸형과 呂형주거지의 관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또한, B지구의 경우 주거지와 저장공, 고상식건물이 밭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육각형주거지 1기와 말각장방형주거지 4기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수혈식저장공과 고상식건물, 도랑유구가 배치되어 있어서 평면배치의 일정한 정형성을 엿볼 수 있다.
그 밖에 백제시대의 유구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대규모의 밭이 있는데, 상하의 두 개 층으로 구분된다.
밭의 구조는 상하층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경작법의 발전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재배작물의 종류가 다른 데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에 대한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이들 두 개의 밭은 확인된 규모만 해도 1,700여 평과 3,000여 평에 달하는 대규모여서 단순히 자급자족을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한성 백제의 중심지로 알려지고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에 공급하기 위한 생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시대는 출토유물과 층위관계를 통해서 4기로 구분된다. 제1기인 A지구의 (타)원형 주거지는 B지구 하층과 중층 시기인 제2기 및 제3기보다 약간 이른 시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제2기와 제3기의 연대를 고려할 때 대략 서기전 3세기경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제4기는 B지구 상층 시기로 출토유물로 보아 연대는 대략 6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제2기와 3기는 4∼5세기로 추정된다.
미사리유적은 한강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한 취락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백제시대에 이르는 오랜 동안의 유구가 층서를 이루며 분포되고 있어서, 우리나라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한강하류 유역 취락 발전에 대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미사리에서 조사된 밭은 한성 백제의 왕도로 비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생산기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