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암사동 유적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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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암사동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 돌도끼 등이 출토된 집터. 주거유적.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서울 암사동 유적(서울 岩寺洞 遺蹟)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지/주거지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79년 07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 강동구 암사2동 155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 돌도끼 등이 출토된 집터. 주거유적.
개설

1979년 7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한강 아래쪽의 하안단구에 위치하며 강 건너에는 아차산성이 마주한다. 1925년의 대홍수로 유물 포함층이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때 황산장삼랑(橫山將三郞)나 등전양책(藤田亮策) 등 일인학자들이 엄청난 양의 토기·석기를 채집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1966년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사단에 의해 정식 발굴되었다. 이 때에는 원형 움집 2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돌도끼[石斧], 그물추[漁網錘],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1967년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박물관의 연합발굴이 있었으며 1971∼1975년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4차에 걸쳐 조사하여,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취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된 면적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암사동 유적은 방대하다.

내용

암사동 유적은 6개의 자연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로부터 겉흙층, 검은모래층(백제문화층), 흑회색모래층(청동기문화층), 누런모래층(비문화층), 붉은갈색모래층(신석기문화층)이 있고 바닥은 생토층이다. 신석기문화층은 발굴지역의 전역에서 나타나는데 두께는 40∼60㎝ 정도이며 때로는 80㎝ 정도로 두꺼운 곳도 있다. 이층이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신석기문화층으로서 유적의 주 문화층이다.

여기에서 문화층은 3개가 있는데 검은모래층은 두께 40∼60㎝의 백제시대의 문화층으로서 백제 초기 때의 승석문(繩蓆文)목단지와 이음식독널무덤[合口甕棺墓], 쇠도끼[鐵斧], 쇠못, 불에 탄 건물자리 및 탄화된 목재 등이 나왔다. 흑회색모래층은 두께 20∼40㎝의 청동기시대층으로 민무늬토기, 이중구연(二重口緣)토기, 가락바퀴[紡錘車], 돌도끼, 돌끌[石鑿], 청동촉 등이 출토되었다.

1983∼1984년 조사에서 확인한 신석기 집터는 1975년도 4차 조사에서 확인한 11기에 1기가 더 찾아져서 모두 12기이다. 이 가운데 크기가 매우 작아 일종의 내부시설로 보는 원형 집터 7호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모죽은 네모꼴[抹角方形]이다. 집터는 모래땅에 움을 파고 지었으며 집터 한가운데에는 강돌[川石]을 둘러 만든 화덕[爐]시설이 있고 집터 한쪽으로 나들이를 위한 계단을 만든 곳도 있다. 출입구는 대개 남향을 하고 있다. 기둥구멍[柱孔]은 한 집안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주 기둥과 함께 이를 버텨주는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집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6m 정도인데 이보다 좀 큰 경우 집 안에 선반같은 저장시설이 있거나 6호 집자리(크기 7.9×6.6m)에서 보듯이 내부에 다시 원형의 움이 파져 있는 특이한 경우가 있다. 이는 평양의 남경 31호 집자리, 금탄리 11호 집자리와 유사한데 마을의 공동창고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집구조는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어 지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집터 밖에는 저장구덩이, 야외노지, 강자갈이나 깬돌[割石]을 원형·타원형으로 쌓은 돌무지시설[積石施設] 4기가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열을 받은 흔적이 있고 돌무지 아래에는 불탄 흙, 부식토와 함께 많은 목탄이 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수십 점의 빗살무늬토기들이 출토되므로 토기를 굽던 한데가마[露天窯] 또는 공동의 화덕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문화층의 출토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와 석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밖에 새뼈와 도토리가 조금 나왔다. 암사동이 대단위취락이며 많은 집터들이 찾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강안단구에 있는 유적의 입지 탓에 유기물은 빨리 부식되고, 강물에 자주 휩쓸려 유물이 매우 적게 출토되는 편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이 많으며 무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늬는 출토토기의 약 90% 정도가 입술부분의 평행밀집사단선문과 몸체부분의 어골문(魚骨文)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부위를 가리지 않고 전체를 같은 무늬로 베푼 것도 있다. 또 입술과 몸체의 중간부분에 이른바 종속구연문(從屬口緣文)으로서 점물결무늬[波狀點線文]가 베풀어 진 것도 있다. 이러한 토기상들은 모두 서해안의 궁산 유적과 지탑리 유적에서 보던 것들과 동일하다.

석기는 뗀석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도끼, 긁개, 찍개 등이 있다. 또 납작하고 작은 강자갈의 양쪽 끝을 때려내어 만든 그물추도 매우 많이 나온다. 간석기[磨製石器]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이 있다. 암사동에서는 삼각형과 이른바 역자식(逆刺式) 화살촉이 주로 만들어졌다. 1994년도의 보고서에 의하면 농사용 석기가 다량으로 나온다. 1985년의 보고서에서는 실리지 않았으나 그동안 알려진 암사동의 출토 석기에서 보자면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맷돌, 갈돌[石棒], 갈판[전石], 괭이, 보습, 돌낫[石鎌] 등이 나오고 있다.

암사동에서 나온 맷돌이나 갈돌 세트는 주로 유적에서 나온 도토리 및 식물채집과 관련지어진다. 그러나 암사동에서는 반달돌칼, 괭이, 보습, 돌낫 등 농사에 필요한 다종다양(多種多樣)의 도구들이 거의 세트로 갖추어져 나왔으며 이러한 양상은 궁산이나 지탑리, 남경 등에서 보는 바와 같다. 따라서 암사동과 같은 대단위 취락에서 다량의 채집행위와 함께 농사짓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암사동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값은 많으나 6200∼3400 B.P. 사이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며 5000 B.P. 정도가 중심연대로 보인다. 토기무늬의 변천을 이용한 시기구분을 보면 토기의 대부분이 입술·몸체·밑 부분을 구분하여 무늬를 베푼 구분계 전면시문형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신석기 전기의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탄소연대측정값과 형식분류의 관점이 대체로 잘 맞아들고 있어 암사동 유적의 연대는 한국의 신석기시대에서 전기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빗살무늬토기와 민토기 사이의 이른바 과도기형 토기의 존재가 거론되며, 이 같은 현상은 바로 이웃한 미사리 유적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에 비추어 사람들이 암사동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암사동Ⅱ』(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강동구, 1999)
『암사동』(국립중앙박물관, 1995)
『암사동』(국립중앙박물관, 1994)
『암사동』(임효재,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11, 1985)
『암사동』(서울대학교박물관, 1985)
『암사동구혈주거지 복원기초조사보고서』(암사동유적발굴조사단, 1984)
『암사동긴급발굴보고』(암사동유적발굴조사단, 1983)
「한반도 중서부지방의 신석기문화」(한영희, 『한국고고학보』5, 1978)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대하여」(한병삼, 『박물관신문』65, 1976)
「암사동 신석기시대 주거지조사」(이백규, 『한국고고학연보』3, 1976)
「서울 암사동 선사취락지」(김종철, 『한국고고학연보』2, 1975)
「암사동소재 선사시대 취락지 발굴조사」(김종휘, 『박물관신문』40, 1974)
「암사동 신석기시대 주거지 조사」(이백규, 『박물관신문』51, 1974)
「한국수혈주거지 2」(김정기, 『고고학』3, 1974)
「암사동 강안유적 발굴보고」(김광수, 『역사교육』12, 1970)
「암사동 강안유적 발굴보고」(김광수, 『역사교육』13, 1970)
「암사동 즐문토기 유적발굴 개보」(김광수, 『고고미술』100,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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