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 송죽리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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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죽리 유적 출토 빗살무늬토기
송죽리 유적 출토 빗살무늬토기
선사문화
유적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고인돌 · 회곽무덤 관련 복합유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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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고인돌 · 회곽무덤 관련 복합유적.
내용

1989년에 처음 발견되었고, 1991∼1992년에 구성 지방공단 조성지역에 편입되어 계명대학교박물관이 발굴하였다. 유적은 강가 충적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신석기시대 수혈주거지는 모두 10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長方形)이 9기인데 비하여 원형(圓形)은 1기로서 장방형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규모도 원형이 소형(지름 4.1m)인데 비하여 장방형은 중형(5.0×3.4m) 또는 대형(7.5∼9.9×4.9∼7.4m)이면서 모서리가 말각(抹角)된 특징을 보인다. 깊이는 0.3∼0.6m로, 바닥에는 대다수가 별도의 시설없이 한가운데 방형(方形)의 화덕자리(爐址)가 나타난다. 저장구덩이(貯藏穴)는 주거지 안팎에서 노출되는데, 내부 저장혈은 원형 또는 타원형의 평면형태로서 대개 2기를 원칙으로 하며, 타원형인 경우 장축방향은 주거지 장축방향과 같다. 외부 저장혈은 장방형 주거지에서만 1기씩 갖춰져 있는데, 모두 타원형 평면형태로서 주거지 장축방향과 일치한다. 이 외에 신석기시대 유구로는 15기의 야외 노지와 추정 토기요지, 그리고 석기제작장 등이 있다. 출토유물은 바리모양(鉢形)과 단지모양(壺形)의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저부(底部)는 뾰족밑(尖底), 둥근밑(圓底), 납작밑(平底)으로 다양하다. 토기문양은 매우 다양한데 뾰족밑의 경우는 바닥까지 무늬가 있으나 납작밑과 둥근밑에는 무늬가 없다. 소형의 장경호는 목부분에만 무늬가 있다. 무늬는 압인문(押印文)과 침선문(沈線文)으로 나눌 수 있는데, 심선문이 훨씬 많으며 그 중에도 태선문(太線文)이 우세하다. 무늬의 종류는 능형집선문(菱形集線文), 톱날무늬(鋸齒文), 생선뼈무늬(魚骨文), 각종 단사선문(短斜線文), 파상문(波狀文), 지자문(之字文), 꿰맨무늬 등이 단독으로 또는 복합되어 베풀어진다. 석기는 무경식화살촉(無莖式石鏃)의 수렵구와 갈판(碾石), 갈돌(石棒), 돌낫(石鎌), 어망추(漁網錘) 등의 생활용구가 출토되어 농경의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구 연대는 압인문 계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라고 보아지나 태선침선문의 우세로 볼 때 중심연대는 신석기 중기 무렵이라고 판단된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모두 62기이나 원래는 100여 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집자리의 평면구조는 원형, 정방형, 장방형의 세 종류가 있으며 장방형 집자리가 40기로 가장 많고 크기에 따라 다시 대형과 소형으로 나뉜다. 집자리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집자리 바닥에는 별도의 시설은 없으나 대부분 불규칙적인 기둥구멍(柱孔)이 있으며 기둥구멍 대신 주춧돌을 놓은 예도 3기가 있다. 집자리 안에 내부 저장구덩이(貯藏穴)이가 있는 경우는 19기가 확인되었다. 화덕자리는 장방형 집자리에서 많이 보이고 원형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형 장방형 집자리의 경우 화덕자리는 바닥에 판상석(板狀石)을 깔고 둘레에 냇돌(川石)을 세워 돌린 것이 26기 있다. 집자리 주변에 돌무지(積石)들이 17기나 나타났는데 폐기장이나 야외조리장 또는 뒷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적의 북쪽과 서쪽으로 길이, 너비, 깊이가 300×1.3×0.6∼1.0m의 도랑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청동기시대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환호(環濠)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토기와 석기들이 있다. 토기로는 민무늬토기 바리(鉢), 단지와 바리형 붉은간토기(紅陶)가 있으며 흙으로 빚어 만든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도 있다. 석기로는 간돌검(磨製石劍), 돌창(石槍), 화살촉, 달도끼(環狀石斧), 돌도끼(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등이 나왔다. 유적의 연대는 청동기시대 중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송죽리 고인돌은 대부분 냇돌(川石)로 만들어진 구덩식(竪穴式)이며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반지하식(半地下式)으로 된 2기를 제외하면 17기가 모두 지상식(地上式)인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돌은 서로 밀집되어 있는 것과 단독으로 있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밀집되어 나타나는 고인돌 유형의 경우 서로 묘역이 연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밀집군이 아닌 고인돌의 경우 장방형 매장공간(埋葬空間)의 장축이 강물 흐르는 방향과 일치하는데, 침향(枕向)은 매장주체부의 구조와 약간의 인골(人骨)이 유존된 예로 보아 남향(南向)이었던 것으로 추정(推定)되고 있다. 또 묘역 외곽 지반(地盤)에 직경, 깊이가 0.3×0.3m 규모의 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돌도끼를 세워 둔 예도 있다. 고인돌 매장주체부의 남쪽 외곽 1.0m 지점에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꽂힌 상태로 출토되었고 매장주체부 안에서는 물미(鐵준) 모양의 소형 동기(銅器)가 나왔다. 고인돌 매장주체부 안에 부장된 토기는 모두 붉은간토기로서 2∼5점까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바리모양 붉은간토기와 항아리모양 붉은간토기 등이 있다. 석기류로는 촉의 몸체부가 긴 유경식돌화살촉, 무경식삼각돌화살촉(無莖式三角石鏃), 편인돌도끼(偏刃石斧), 숫돌(砥石), 석추(石錐)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 통일신라시대의 수혈주거지 1기와 고려시대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1기, 그리고 조선시대 회곽묘(灰槨墓) 1기가 조사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으로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유사한데, 내부에서 화장골호(火葬骨壺)로 많이 사용된 와질(瓦質)의 지그재그형 점선문(點線文)이 시문된 전형적인 통일신라토기가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석곽묘는 반지하식의 세장형(細長型)으로서, 내부에서 청동제 숟가락과 토기편병(土器扁甁)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회곽묘는 도굴에 의하여 유물도 도난당했지만 유구도 일부 훼손된 채 노출되었다.

의의와 평가

송죽리 유적의 발굴조사로 신석기시대의 취락과 청동기시대의 취락 및 분묘 등 한반도 남부 내륙지방 선사문화상의 연구에 지역적인 자료의 공백을 메꿀 수 있고, 또 단위유적의 자료도 다량일 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확보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개교 40주년기념 금릉 송죽리 유적 특별전도록』(계명대학교박물관, 1994)
「금릉송죽리선사유적의 개요」(조영현, 『금릉송죽리유적』, 계명대학교박물관, 1994)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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