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 ()

토기 가마
토기 가마
공예
개념
토기 · 질그릇 · 오지그릇 · 도자기 · 기와 · 벽돌 · 숯 따위를 구워내는 시설.
정의
토기 · 질그릇 · 오지그릇 · 도자기 · 기와 · 벽돌 · 숯 따위를 구워내는 시설.
도자기의 발달 개요

가마터·가마자리라고도 한다. 가마터라 하면 토기·질그릇·오지그릇·도자기·기와·벽돌·숯 따위를 굽던 자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에서는 도자기를 굽던 자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토기·도자기를 많이 만들어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질이 우수하고 형태와 문양이 아름답고 독창성이 있으며, 중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제일 먼저 자기를 만들어 썼기 때문에 도자기의 나라라고 한다. 따라서, 전국 방방곡곡에는 수많은 가마터가 남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자기가 우리 전통문화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오래고 뛰어난 문화이면서도 도자기 연구의 기본자료인 가마터가 일제침략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허술하게 취급되고 도굴·파괴되어 그 자리가 너무 많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릇을 굽는 가마가 언제부터 어떤 형태로 시작되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신석기시대에는 낮은 화도(火度)에서 산화번조(酸化燔造)로 구워낸 빗살무늬토기[櫛目文土器]와 무문토기(無文土器)가 있었으며, 청동기시대인 서기전 4세기경에는 흑색마연토기인 이른바 흑도(黑陶)가 생산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가마가 없어도 구워낼 수 있지만, 무문토기는 반쯤 폐쇄된 원시적 가마 형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흑도의 경우에는 폐쇄된 공간인 가마의 형태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며,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가 가능한 견고하고 완벽한 가마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흑도는 흑연을 섞은 것도 있으나 초보적인 환원번조로 되기 때문이다.

초보적 환원번조는 토기를 구울 때 아궁이와 연기가 나가는 구멍만이 있는 폐쇄된 공간인 가마에서 마지막 단계(약 900∼1,000℃)에 장작을 많이 넣고 연기구멍과 아궁이를 막아 불완전연소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시커먼 검댕연기(탄소 알갱이)가 토기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흑도는 폐쇄공간인 가마가 없으면 절대로 만들어낼 수가 없다. 처음 흑도는 제례용이나 부장용으로 만들어졌으나, 이것이 발전되어 점차 일상생활용으로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서기전 2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른바 와질토기(瓦質土器)이다. 여기에서 더욱 발전한 것이 3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삼국시대의 경질토기이며, 이를 석기(炻器)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유약이 입혀진 석기가 만들어졌고,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청자도 만들고 바로 이어서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조선시대 전기에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주로 생산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백자를 주로 생산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도자사에는 흑도에서 백자로 이어지는 큰 줄기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와질토기가 그대로 이어지는 질그릇, 무문토기에서 이어지는 오지그릇, 와질토기에서 화도를 높여 발전한 기와와 벽돌[塼] 등이 있다.

이렇게 토기·도자기가 다양하게 발전한 것은 우리 생활이 발전하고 적재적소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를 만들어 이용할 줄 아는 우리 민족의 뛰어난 슬기이기도 하다.

가마의 구조와 가마터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수천년 내려온 가마터가 많지만 학술적인 조사를 거쳐 그 성격이나 가마의 규모가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조사된 것을 바탕으로 가마의 구조와 가마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사시대의 가마터

신석기시대에는 처음 완전히 개방된 지상에서 토기를 구웠다. 다음 단계로 반쯤 폐쇄된 구덩이에서,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둥근 구덩이에서 굽기 시작하다 점차 기다란 구덩이를 파서 천장이 없는 반지하 구덩이에서 토기를 구워냈다고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인 서기전 4세기경에는 지하에 땅굴을 파고 땅굴 속에서 토기를 구워내기 시작하였다. 뒤에 이 땅굴가마가 점차 발전하여 땅굴로 된 지하식등요(地下式登窯)가 되고 다시 반지하식등요로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가마터

지금까지 발견, 조사된 가마터 중에서 먼저 백제시대 가마를 살펴보면, 3세기경부터 경질토기인 석기를 생산한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삼룡리와 덕산면 산수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가마터를 들 수 있다.

조사 결과 이들 가마는 땅굴로 된 지하식과 반지하식으로 추정되는데, 가마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큰 가마는 길이 6.6m, 최대너비 3.3m, 경사는 11.1°정도였으며, 작은 가마는 길이 3.6m, 최대너비 1.6m, 경사는 24°정도였다.

대체로 길이는 짧고 너비가 넓으며, 경사가 급하고 아궁이와 번조실·굴뚝이 따로 분명한 구분이 없다. 출토유물은 회흑색 경질토기(석기)·회백색 연질토기·적갈색 연질토기 등으로, 여러 가지 질의 각종 토기가 같은 가마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백제시대의 6∼7세기경 가마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1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2기), 충청남도 부여군 정암리(수기),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본의리에서 발견, 조사되었다.

이들 가마는 반지하 터널식 형태로 평면은 말각형직사각형(抹角形直四角形)으로 앞의 가마에 비하면 길이는 길어지고 너비와 경사는 줄어들었고, 아궁이·번조실·굴뚝이 구분되는 구조로 발전하였다.

삼국시대 신라·가야의 토기가마터는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광석마을, 화곡리 냉정골, 덕천리와 경산시 중산동,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 및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송림리(삼국 후기·통일신라) 등에서 발견되었다. 그중 합천군 봉산면 송림리의 경우를 보면 후기 백제시대의 가마와 비슷하다.

통일신라시대의 가마터

통일신라의 가마터는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일부 삼국시대 포함)·화산리·덕산리(삼국시대 신라 포함), 서울 동작구 사당동,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등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삼국 후기 가마와 비슷한 반지하식인 말각의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아궁이·번조실·굴뚝이 구분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가마터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의 요지군을 들 수 있다. 이들 토기가마는 국내 토기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로 생각하여 왔으나, 안압지 발굴 이후 대체로 신라 말기로 추정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마는 부여지방(백제)과 경주지방(신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발견조사 지점은 충청남도 부여읍 동남리·쌍북리·현북리·용정리·정동리, 부여군 규암면 신리, 장암면 정산리,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와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하구리 다경마을, 천북면 동산리, 안강읍 육통리 등지이다.

기와가마는 거의 전부 지하땅굴식등요(최근까지도 기와가마는 기와굴이라고 하였다.)로 기다란 말각형터널과 같고 가마바닥은 계단식으로 된 곳도 있다. 또 가마 평면이 사각형에 가마바닥은 수평이고, 아궁이와 번조실과 굴뚝이 완전히 구분되는 특수한 평요식(平窯式) 가마도 있으며, 토기를 함께 구워낸 곳도 있다.

고려시대의 가마터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부터 우리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경질토기와 일부 유약을 입힌 시유토기(施釉土器, 灰釉)에 중국 저장성(浙江省) 일대에서 발달한 청자의 영향이 들어와 청자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청자문화는 이때 중국문화가 쉽게 파급되고 경제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어 한 발 앞서 가던 문화권인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일대에서 먼저 발달하였다.

서남해안 지역에서도 기후적 요건과 경제적 요건이 일치하였던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전라북도·충청남도·경기도에서 가마터가 많이 발견되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서도 한두 군데 발견되었는데,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초기 청자 중 양질의 이른바 햇무리[日暈文]굽 청자가마터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일대, 강진군 칠량면 일부 지역,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반암리,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고양시 원당동,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상반곡리에 있다.

이보다 조금 뒤늦은 조질(粗質)의 녹청자(綠靑磁) 가마터는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일대,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내태리, 부산광역시 덕포리 가마터 등이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초기 청자 가마터 중 대표적인 것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가마터이다. 이때의 가마는 처음에는 반지하로 약간 넓고 기다란 골을 파고 돌과 벽돌로 양 벽을 쌓고 벽돌로 천장을 쌓은 것 같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벽돌로 가마벽과 천장을 쌓았으며 가마의 추정 길이는 40m, 너비는 1.8m였다. 첫 번째 가마는 아마 길이가 두 번째 단계의 가마보다 짧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가마 너비는 약간 더 넓었을 것이다.

청자 초기에 양질 청자를 생산한 이른바 해무리굽 계통 청자가마(용인에서는 백자도 같이 생산함.)에서는 개비[匣·匣鉢: 자기를 구울 때 재티가 내려앉지 않도록 자기를 덮어씌워 굽는 커다란 그릇]를 사용하여 자기를 구웠으므로 생산비가 많이 들었으나 그 질이 좋았으며, 이후에도 양질 청자는 모두 개비에 넣어 번조하였기 때문에 가마터에는 개비의 퇴적물이 제일 많다.

청자는 처음부터 우수한 질로 많은 수량이 생산되었다. 10세기 이후 고려청자는 더욱 급속도로 발전하여 12세기 전반과 중엽에 절정에 이르렀으며, 몽고침입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질은 저하되었으나 14세기에는 수요가 많이 늘어나서 전국에 소규모의 가마가 많이 생겨났다.

청자 초기에 서남해안 지역에 많이 분포되었던 가마는 그 후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등에도 새로운 가마가 생겨났지만 10세기 말경에 시작하여 11∼12세기에는 강진과 부안에 집중되어 14세기 후반경까지 강진과 부안에서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었다.

14세기 말경 개경의 중앙정부 통제가 이완되고 도자기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강진과 부안의 가마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4세기 말∼15세기 초의 청자가마터는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하였다.

11∼14세기까지의 가마 운영에 대하여는 『고려사』 식화지(예종 3년, 1108)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고적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수공업집단의 일정한 행정구역이라고 생각되는 소(所) 중에서 자기소[大口所·七陽所]가 강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은 고려청자 가마터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또한, 『고려사』 식화지(문종·인종조)에 제요직(諸窯直)·육요직(六窯直)이라는 기록과 함께 이들 요직들이 녹봉 8석(石) 10두(斗)를 받는 다른 관원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직이라는 관원들이 자기소를 관할한 관요(官窯)의 형태였을 것이다. 현재 강진에는 대구면 용운리·계율리·사당리·수동리에 약 190개소, 칠량면 삼흥리에 10개소 정도의 가마터가 남아 있고,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와 산내면 진서리에 약 80개소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가마 구조는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용운리 가마터와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의 가마터 조사에서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가마가 후기로 내려올수록 초기 가마보다 가마 너비가 점차 좁아졌으며, 가마의 경사도 완만해졌다.

용인의 경우, 중기·후기에는 전체길이가 83.26m나 되고 가마 너비는 1.2∼1.5m이며, 봉통(아궁이)길이 5.7m, 출입문수 23개, 출입문 간격 2.5∼3m였다. 가마바닥은 11°정도의 경사로 모래바닥이나 바닥에 개비를 엎어놓아 단(段)과 같이 수평을 유지하였으며 가마는 진흙으로 쌓았다.

초기 가마는 거의 전부 반지하식이나, 중기·후기의 가마는 처음 축조시에는 반지하식인 것도 있으나 그 자리에서 자꾸 개량 보수하여 나가기 때문에 4∼5차례 개축하면 결국 지상으로 올라오게 된다.

강진의 경우, 처음부터 개비와 가마벽 등 가마 퇴적물 위에 가마를 축조한 경우도 많다. 용인의 경우에는 중간에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겠지만 한 자리에서 몇 백년을 개축하면서 가마를 운영하여 후기에 이르러 지상으로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기·후기의 가마는 봉통과 가마(번조실) 사이에 살창이 있는 것이 있으며 가마를 몇 개의 칸으로 구획한 것도 있다. 그리고 가마 한쪽에는 출입구가 있고 또 불을 들여다보는 구멍이 있는 등 자기를 성공적으로 구워내기 위한 여러 가지 발달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시대 기와가마터[瓦窯址]는 그 수량은 대단히 많았겠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곳은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과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동쪽 가마터 등이다. 용수동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이고, 미륵사지 가마는 반지하식 가마이나 등요와 평요의 절충형이다.

두 가마의 길이는 6.4∼6.6m, 너비는 1.9∼2.95m이며, 아궁이·연소실·번조실·연도(미륵사지 가마는 연도는 유실)를 갖추었고 가마바닥은 단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 확실한 조사를 거친 것은 아니나 기와가마터의 지표조사에 따르면 단애면의 밑으로 굴을 파서 만든 지하땅굴식 등요가 조선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가마터

앞에서 설명하였지만 고려 말∼조선 초에는 소규모에 조질의 청자가마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으며, 바야흐로 백자시대에 들어가 있던 원(元)·명(明)의 영향으로 새로운 백자가마(관악산 백자가마터, 고려말)도 생겨나고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청자가마는 점차 줄어들고 변형되어 분청사기를 생산하게 되고 백자가마가 급속도로 확산된다.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사기 사용의 증대와 조선 초 국민생활의 다양화 및 문화향수권의 증대로 도자기의 수요가 계속 늘어났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다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 등 도자기 생산의 능력 향상을 위한 시책이 국초부터 시행되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도자기 생산지와 그 질 등을 면밀하게 조사한 것을 들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에 자기소 139개소(경기도 14, 충청도 23, 경상도 37, 전라도 31, 황해도 12, 강원도 4, 평안도 13, 함길도 5), 도기소(陶器所) 185개소 (경기도 20, 충청도 38, 경상도 34, 전라도 39, 황해도 17, 강원도 10, 평안도 12, 함길도 15)가 기록되어 있고, 각 소의 소재지와 품질을 상·중·하로 구분하였다.

182개의 지방 단위 행정구역 내에 324개소의 가마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도자기의 제반 상황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다음, 제도의 정비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이어 이미 1392년(태조 1)에 사선서(司膳署)를 설치, 바로 이어 사옹방(司饔房)이라 하고, 1467년(세조 13) 재정비하여 사옹원이라 한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내려왔다.

사옹원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맡았으나 그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궁중에서 사용할 사기(沙器: 도자기)를 번조하여 어부(御府 : 궁중)에 수납하는 일이었다.

『경국대전』 공전(工典)에는 사옹원에 경공장(京工匠 : 중앙의 사기장인) 380명, 내수사(內需司) 사기장인 6명, 외공장(外工匠)인 지방 각 도의 사기장인 99명이 기록되어 있다. 16세기부터는 사옹원의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어 궁중용 사기의 번조는 사옹원의 계획과 지시에 의해서 광주분원에서 전담하게 된다.

또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지방 각 도에서 자기를 번조하는 곳이 많으며 고령 것이 정절(精絶)하나 광주의 것이 가장 뛰어나다.

광주에는 매년 사옹원 관원이 파견된다. 좌우의 변(邊)으로 나뉘어 각기 서원(書員)을 인솔하여 봄부터 가을에 걸쳐 사기를 번조하여 어부에 수납한다.”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조에는 “매년 사옹원 관원이 어기(御器)를 감조(監造)한다.”라 하였다. 또, 이 책에는 전국 40개의 지방행정 단위에 자기 31, 사기 4, 도기 12개소 등 생산지가 47개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일련의 기록을 검토하여 보면 세종대까지 고려 말∼조선 초의 조질청자가마는 점차 사라지거나 분청사기가마로 이행되었고 새로 분청사기가마가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백자가마도 많이 생겨났다. 왕실의 사기(도자기) 수요는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국초에는 이를 위하여 각 지방의 자기소·도기소에서 공물로 충당하였으나 폐단이 많아서 15세기 말경 경기도 광주를 왕실용 도자기(주로 백자) 번조의 중앙관요로 개편, 운영하였으며 『경국대전』의 경공장 380명은 바로 사옹원 소속의 광주 소재 중앙관요의 장인수였다.

이후 광주 중앙관요는 조선 말까지 궁중 소용의 상품 자기 일체를 생산하였음은 물론이고, 전국민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시대가 내려올수록 민간수요의 자기도 상당량이 여기서 유출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편찬 당시는 전국의 도기소·자기소가 324개소였으나 광주가 중앙관요로 그 규모가 대폭 확장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마지막 편찬 당시 전국의 가마는 47개소에 불과하였으니 광주관요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광주관요는 전적으로 국가에서 운영하였으므로 전국에서 양질의 원료를 가져오고 우수한 장인들을 데려다가 많은 실험을 거쳐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조 도자기의 일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광주 가마터의 조사 연구는 바로 조선백자 연구의 기본이다.

지금 경기도 광주에는 퇴촌면(우산리·도마리·도수리·원당리·관음리·정지리), 도척면(상림리·궁평리), 중부면(번천리·오전리), 초월면(무갑리·학동리·쌍동리·대쌍령리·산이리·지월리·선동리), 실촌면(유사리·신대리·오향리·곤지암리·열미리·건업리), 남종면(귀여리·금사리·분원리)에 169개소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물론 더 많은 가마터가 있었겠지만 자연유실과 수많은 토목공사·경지조성·도굴 등으로 반 이상이 없어진 상태라고 생각된다.

광주가마는 중앙관요 이전에도 전국에서 상품 중의 상품을 번조한 가마였다. 전국에 상품 백자를 번조한 가마는 상주·고령·광주 세 곳밖에 없었는데, 그 중 광주백자가 가장 뛰어났다고 하였다.

광주가 중앙관요로 개편된 이후에는 좋은 백자를 만들기 위한 국가의 온 정성이 여기에 모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의 수많은 가마터를 시대별로 나누어 보면 전기 중 15세기의 가마터는 우산리·번천리·무갑리·도마리·오전리 등에 남아 있고, 16세기의 가마터는 관음리·정지리에, 17세기 전반의 가마터는 탄벌리·상림리·선동리에 남아 있다.

중기인 17세기 후반 18세기 전반의 가마터는 송정리·유사리·신대리·탑립리와 궁평리·관음리·오향리·금사리에 남아 있고,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 19세기의 가마터는 분원리에 남아 있다.

도자기를 번조하려면 우수한 장인과 원료, 번목(燔木)인 땔감이 중요하다. 우수한 장인과 원료의 계속적 확보도 어렵지만 광주관요의 경우 번목이 큰 문제였다. 번목의 조달을 위하여 광주 일원을 사옹원의 시장(柴場)으로 엄격히 관리하면서 나무가 무성한 곳을 찾아 대략 10년에 한 번 정도 가마를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부터는 광주시장이 황폐하여 이곳의 번목만 가지고는 충당할 수 없어 한강을 통하여 하류로 내려오는 모든 유하목(流下木)에서 세(稅)를 거둬들여 충당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최후의 분원가마는 경안천(慶安川)의 하구이자 한강의 본류와 가장 가까운 분원리에 만들게 되었다.

가마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광주관요에서는 상품 자기만 번조한 것이 아니라 상품 자기 가마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중품과 하품 가마가 있어서 더 많은 양의 중품과 하품 자기를 생산하여 여러 가지 수요에 충당하였다.

그리고 17세기 말경부터는 점차 상품·중품·하품의 차이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전반적으로 상품에 가까운 양질의 백자를 생산하게 된다.

상품을 번조할 때는 고려와 같이 조선에서도 자기 하나하나를 개비 속에 넣어 번조하였으므로 상품을 번조하던 가마터에는 개비가 많이 쌓여 있다. 조선시대의 개비는 밑짝과 뚜껑이 있으며, 뚜껑의 내면에는 백토분장을 하여 철분 등 잡물이 옮기는 것을 예방하였다.

가마의 구조는 ① 바닥이 지하로 약간 들어간 연방계단식(聯房階段式)가마와 ② 봉통과 번조실 사이에만 살창(칸막이 밑의 불구멍)을 설치하고 번조실은 칸이 없이 측벽에 출입구가 있는 곳만 가마바닥의 경사를 급하게 하여 계단같이 만들고 가마바닥은 약간 경사진 계단과 같은 가마가 있으며, ③ 전체 가마바닥이 계단식이 아닌 경사가 진 가마도 있다.

계단식 가마에서는 개떡[陶枕: 도지미, 그릇을 구울 때 가마바닥에 놓고 그릇을 그 위에 올려놓고 굽는다.]을 수평으로 만들고, 경사진 가마에서는 개떡이 경사에 따라 각이 다른 직각삼각형이다.

우리나라 가마의 위치선정

우리나라의 가마는 기후가 온화한 남쪽에 많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말 고려시대의 도자기 가마도 서남해안에서 발생하였고 후에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에 집중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324개소의 가마 중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거의 3분의 2나 되는 202개소의 가마가 집중되었고, 그와 달리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가마의 수효가 적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우, 이 시기 (16세기 초)에는 경기도 광주에 거대한 중앙관요가 형성된 것을 예외로 하고 전국 47개소에서 도자기가 생산된다고 하였는데 그 중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가마가 28개소, 경기도의 가마가 좀 늘어나서 16개소이며 북쪽 4개도에는 5개소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전국 가마터 통계에 따르면 대략 1,350기 정도의 가마터가 파악되고 있다. 이를 각 도별로 가마터가 많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전라도 560여 개소, 경기도 약 300개소, 경상도 약 180개소, 충청도 140여 개소, 함경도 약 50개소, 평안도 약 40개소, 강원도 20여 개소의 순이다. 1,350기의 가마터 중 경기도와 그 남쪽에 1,180개소의 가마터가 있으며, 이는 전체의 90%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가마터는 기후가 온화하고 땔감이 풍부하며 물의 이용이 편리한 곳에 많이 남아 있다.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 같은 곳은 기후도 온화하지만 해로를 이용한 도자기 운반이 편리하였을 것이며, 경기도 광주는 한강을 통하여 서울의 왕실로 제품이 운반되고,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모든 재료도 각지에서 광주로 운반하기 쉬웠던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옛날 가마는 기후가 온화한 곳에 세웠으며, 강진·부안·광주와 같이 특수한 목적에 의해서 대규모로 가마가 밀집되는 곳은 기후가 온화화면서 수로를 통한 재료와 제품의 운반이 편리한 곳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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