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선진리성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城)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쌓은 왜성이다. 해안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표고 30m인 북쪽 정상부를 석성으로 두른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남쪽을 토성으로 두른 외성으로 구분된다. 1597년(선조 30) 10월 하순 왜군의 철수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왜장 모리 요시나리 부자(父子)를 비롯한 여러 왜장들이 협력하여 12월 26일 단기간에 준공하였다. 이듬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수비하면서 수축하였으며, 사천읍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
사천 선진리성은 1597년(선조 30) 10월 하순에 축성이 시작되어 12월 26일에 준공되었다. 왜군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城) 부자(父子)와 여러 왜장들이 협력하여 왜군 철수의 거점으로 급히 쌓았고, 이듬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수축하였다. 조선 · 명 · 일본의 문헌에는 모두 ‘사천신책(泗川新寨)’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왜의 석만자(石蔓子) 즉,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둔하고 있는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측 기록에서 고관(古館), 고환(古丸)이라고 불리는 사천읍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
원래 고려시대의 12 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이곳 삼천포에 있었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사천현의 남쪽 17리에 통양창성(通陽倉城)이 있는데 토축(土築)이며 둘레는 3,086척”이라고 하였다. 이곳이 옛날 세곡을 거두던 곳으로, 사천 선진리성(사천왜성)의 하부에서 조사된 토성이 통양창성이다. 조선시대에는 선소(船所)이자 항구로 유명한 곳이었으며 선진(船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읍지』에 따르면 이 선진에는 전함(戰艦) 한 척, 병선 한 척, 사후선(伺候船)이 두 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三千鎭)이라고 불려졌다. 삼천진에 대해서는 『대동지지』에 “선조 30년(1597) 정유년에 왜의 석만자 즉,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곳에 거하여 울산의 도산(島山)과 순천의 왜교(倭橋)와 더불어 칭하기를 ‘삼굴(三窟)’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2002년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선진 공원의 천수각(天守閣) 터 주변 성벽과 동북쪽 평탄면의 남쪽에서 대형의 깬돌을 이용하여 잔돌 끼워 허튼층쌓기 한 사천 선진리성의 성벽이 조사되었다. 호구(虎口) 및 구상유구(溝狀遺構), 주거지 등도 조사되었다. 사천 선진리성의 성벽 하부에서는 고려시대에 기단석 축형 판축 토성으로 쌓은 통양창성의 성벽과 동문지가 확인되었고, 기와 편과 백자 편 등이 수습되었다.
선진리의 서쪽 끝, 사천만의 입구에 위치하는 사천 선진리성은 해안선에 임한 표고 30m 정도의 낮은 구릉 위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입지상으로 해안에 위치한 평산성에 해당한다. 내성은 북쪽 정상부를 두른 석축성이고, 외성은 토축으로 동쪽과 남쪽 외곽을 두르고 있다. 성내는 크게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정상부에는 주곽으로서 동서 약 18m, 남북 약 20m, 잔존 높이 2∼3m의 제1곽을 쌓았고, 제1곽의 가장 높은 곳에는 가로 5m, 세로 6m 크기의 부곽이 딸린 동서 약 10m, 남북 약 15m, 잔존 높이 4m 규모의 천수각 터가 남아 있다. 제1곽 성벽의 경우 60∼120cm×50∼70㎝ 정도의 비교적 큰 자연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한 뒤 그 사이의 틈새는 10∼30㎝의 깬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메웠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남쪽이 250㎝, 북쪽은 430㎝이며, 성벽의 경사는 53도이다.
제1곽의 남쪽 아래에는 동서 약 18m, 남북 약 40m, 잔존 높이 1.5∼2m 규모의 장방형 석축을 연결한 제2곽을 쌓았다. 제2곽의 북쪽 끝에서부터 한 단 정도 낮은 동쪽은 제3곽으로, 토축의 외성이 이어져 남쪽 성벽으로 연결된다. 내성의 북쪽과 외성 바깥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선진리성의 평면 형태는 동쪽 공간이 제곽식(梯郭式)을 보이고, 서쪽 공간이 연곽식(連郭式)을 보이는 복합 형태이다. 그리고 바다 쪽에 면한 남북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들을 지형의 기복을 이용하여 성내에 편입시켜 최외곽의 방어 공간으로 삼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통해 볼 때 성곽의 범위는 동서 최대 550m · 남북 최대 600m 이상이다.
성벽의 축조 기법은 다음과 같다. 대체로 토성이 지나가는 북쪽 및 서쪽은 고려시대 통양창 토성의 기단석을 기저부로 하여 판축부를 적심(積心)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남쪽과 동쪽은 생토면 기저부로 하여 성벽을 쌓은 뒤 작은 깬돌로 적심을 채웠다. 성벽이 꺾인 모서리의 경우 제1곽의 남쪽 성벽과 천수각 터 북서와 북동 모서리에서는 엇갈려 쌓기 수법이 보인다. 그리고 천수각 터 주위의 석축을 보면 짧은 모서리 돌을 사용하고 있는데, 길고 짧은 석재의 배열 순서가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종류의 모서리 석축은 기장 왜성이나 서생포 왜성, 일본의 나고야성(名護屋城), 쿠마모토성(熊本城) 등 근세 초두의 일본식 성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기술이다. 성벽의 기단부는 석재끼리 붙여 쌓지 않고 작은 돌들을 가득 채워 크게 벌어진 간격을 메우면서 성벽을 쌓았다. 이것은 전쟁 중 단기간에 축성하여야 하는 제약된 조건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조달 석재를 절약하기 위하여 석재를 분산하여 배치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 · 중로군 · 동로군으로 육로군을 편성하여 수로군과 함께 순천왜성과 사천왜성(사천 선진리성), 울산왜성의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개시하였다. 10월 동일원(董一元) 휘하의 조명 연합군이 사천 선진리성을 공격하는 사천성 전투가 벌어졌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인솔하는 왜군 7천 명과 조명 연합군 약 4만 명이 싸웠는데 결과는 왜군의 승리로 끝났다.
한편 이 성을 둘러싼 바다는 1592년 5월 29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거북선을 실전에 사용하여 일본 수군을 섬멸한 사천양 해전(泗川洋海戰)으로 유명하며, 현재 선진 공원 내 바다가 잘 조망되는 서남쪽에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李忠武公泗川海戰勝捷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내성의 무너진 성벽과 외성의 토성을 정비 ·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천 선진리성은 일본 성곽의 변천사 입장에서 볼 때, 중세 성곽에서 근세의 완성형 성곽으로 변화를 이루는 단계에서 과도기에 구축된 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선진리성에서 조사된 성벽과 부속 시설물들은 일본 내에서는 남아 있는 사례가 거의 없는 변혁기 성곽의 건축 · 토목 기술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