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선진리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쌓은 왜성.
이칭
이칭
사천왜성(泗川倭城), 사천신책(泗川新寨)
유적
건립 시기
1597년(선조 30)
관련 국가
일본
관련 인물
시마즈 요시히로
높이
4m
둘레
1km
면적
92.153㎡
소재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시도문화재자료
지정기관
경상남도
지정번호
제274호
지정일
1998년 11월 13일
소재지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웹페이지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800500000&pageNo=1_1_1_1&sngl=Y
내용 요약

사천 선진리성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城)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쌓은 왜성이다. 해안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표고 30m인 북쪽 정상부를 석성으로 두른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남쪽을 토성으로 두른 외성으로 구분된다. 1597년(선조 30) 10월 하순 왜군의 철수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왜장 모리 요시나리 부자(父子)를 비롯한 여러 왜장들이 협력하여 12월 26일 단기간에 준공하였다. 이듬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수비하면서 수축하였으며, 사천읍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

정의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쌓은 왜성.
건립 경위

사천 선진리성은 1597년(선조 30) 10월 하순에 축성이 시작되어 12월 26일에 준공되었다. 왜군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城) 부자(父子)와 여러 왜장들이 협력하여 왜군 철수의 거점으로 급히 쌓았고, 이듬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주9하였다. 조선 · 명 · 일본의 문헌에는 모두 ‘사천신책(泗川新寨)’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왜의 석만자(石蔓子) 즉,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둔하고 있는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측 기록에서 고관(古館), 고환(古丸)이라고 불리는 사천읍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

원래 고려시대의 12 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이곳 삼천포에 있었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사천현의 남쪽 17리에 통양창성(通陽倉城)이 있는데 토축(土築)이며 둘레는 3,086척”이라고 하였다. 이곳이 옛날 주10을 거두던 곳으로, 사천 선진리성(사천왜성)의 하부에서 조사된 토성이 통양창성이다. 조선시대에는 선소(船所)이자 항구로 유명한 곳이었으며 선진(船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읍지』에 따르면 이 선진에는 전함(戰艦) 한 척, 병선 한 척, 사후선(伺候船)이 두 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三千鎭)이라고 불려졌다. 삼천진에 대해서는 『대동지지』에 “선조 30년(1597) 정유년에 왜의 석만자 즉,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곳에 거하여 울산의 도산(島山)과 순천의 왜교(倭橋)와 더불어 칭하기를 ‘삼굴(三窟)’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발굴 경위 및 결과

2002년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선진 주11의 천수각(天守閣) 터 주변 성벽과 동북쪽 평탄면의 남쪽에서 대형의 주12을 이용하여 잔돌 끼워 주13 한 사천 선진리성의 성벽이 조사되었다. 호구(虎口) 및 구상유구(溝狀遺構), 주거지 등도 조사되었다. 사천 선진리성의 성벽 하부에서는 고려시대에 기단석 축형 주20 토성으로 쌓은 통양창성의 성벽과 동문지가 확인되었고, 기와 편과 백자 편 등이 수습되었다.

형태와 특징

선진리의 서쪽 끝, 사천만의 입구에 위치하는 사천 선진리성은 해안선에 임한 주21 30m 정도의 낮은 구릉 위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입지상으로 해안에 위치한 주14에 해당한다. 내성은 북쪽 정상부를 두른 석축성이고, 외성은 토축으로 동쪽과 남쪽 외곽을 두르고 있다. 성내는 크게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정상부에는 주15으로서 동서 약 18m, 남북 약 20m, 잔존 높이 2∼3m의 제1곽을 쌓았고, 제1곽의 가장 높은 곳에는 가로 5m, 세로 6m 크기의 주16이 딸린 동서 약 10m, 남북 약 15m, 잔존 높이 4m 규모의 천수각 터가 남아 있다. 제1곽 성벽의 경우 60∼120cm×50∼70㎝ 정도의 비교적 큰 자연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한 뒤 그 사이의 틈새는 10∼30㎝의 깬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메웠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남쪽이 250㎝, 북쪽은 430㎝이며, 성벽의 경사는 53도이다.

제1곽의 남쪽 아래에는 동서 약 18m, 남북 약 40m, 잔존 높이 1.5∼2m 규모의 장방형 석축을 연결한 제2곽을 쌓았다. 제2곽의 북쪽 끝에서부터 한 단 정도 낮은 동쪽은 제3곽으로, 토축의 외성이 이어져 남쪽 성벽으로 연결된다. 내성의 북쪽과 외성 바깥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선진리성의 평면 형태는 동쪽 공간이 제곽식(梯郭式)을 보이고, 서쪽 공간이 연곽식(連郭式)을 보이는 복합 형태이다. 그리고 바다 쪽에 면한 남북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들을 지형의 기복을 이용하여 성내에 편입시켜 최외곽의 방어 공간으로 삼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통해 볼 때 성곽의 범위는 동서 최대 550m · 남북 최대 600m 이상이다.

성벽의 축조 기법은 다음과 같다. 대체로 토성이 지나가는 북쪽 및 서쪽은 고려시대 통양창 토성의 기단석을 기저부로 하여 판축부를 적심(積心)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남쪽과 동쪽은 생토면 기저부로 하여 성벽을 쌓은 뒤 작은 깬돌로 적심을 채웠다. 성벽이 꺾인 모서리의 경우 제1곽의 남쪽 성벽과 천수각 터 북서와 북동 모서리에서는 엇갈려 쌓기 수법이 보인다. 그리고 천수각 터 주위의 석축을 보면 짧은 모서리 주23을 사용하고 있는데, 길고 짧은 석재의 배열 순서가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종류의 모서리 석축은 기장 왜성이나 서생포 주17, 일본의 나고야성(名護屋城), 쿠마모토성(熊本城) 등 근세 초두의 일본식 성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기술이다. 성벽의 기단부는 석재끼리 붙여 쌓지 않고 작은 돌들을 가득 채워 크게 벌어진 간격을 메우면서 성벽을 쌓았다. 이것은 전쟁 중 단기간에 축성하여야 하는 제약된 조건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조달 석재를 절약하기 위하여 석재를 분산하여 배치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변천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주18은 서로군 · 중로군 · 동로군으로 육로군을 편성하여 수로군과 함께 순천왜성과 사천왜성(사천 선진리성), 울산왜성의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개시하였다. 10월 동일원(董一元) 휘하의 조명 연합군이 사천 선진리성을 공격하는 사천성 전투가 벌어졌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인솔하는 왜군 7천 명과 조명 연합군 약 4만 명이 싸웠는데 결과는 왜군의 승리로 끝났다.

한편 이 성을 둘러싼 바다는 1592년 5월 29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거북선을 실전에 사용하여 일본 수군을 섬멸한 사천양 주19으로 유명하며, 현재 선진 공원 내 바다가 잘 조망되는 서남쪽에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李忠武公泗川海戰勝捷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내성의 무너진 성벽과 외성의 토성을 정비 ·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사천 선진리성은 일본 성곽의 변천사 입장에서 볼 때, 중세 성곽에서 근세의 완성형 성곽으로 변화를 이루는 단계에서 과도기에 구축된 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선진리성에서 조사된 성벽과 부속 시설물들은 일본 내에서는 남아 있는 사례가 거의 없는 변혁기 성곽의 건축 · 토목 기술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泗川 船津里倭城(泗川倭城)의 시·발굴조사』(慶南文化財硏究院, 2002)
『四川 船津里城 公園化事業을 爲한 試·發掘調査 結果略報告』(慶南文化財硏究院, 2002)
『四川 船津里城 追加調査結果報告書』(慶南文化財硏究院, 2003)

논문

나동욱, 「사천왜성과 주변왜성의 성격-순천왜성 사적지정을 위한 세미나-」(순천시, 2013)
鄭義道, 「四川 船津里城의 조사성과」(『壬辰倭亂과 船津里城』, 사천문화원, 2003)

인터넷 자료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조선왕조실록』
주석
주1

일본성에서 중요 거점이 되는 본성을 보조하기 위하여 주위에 쌓은 보조성. 출성(出城)이라고도 함.

주2

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곳.

주3

수영(水營)에 속하여 적의 형편이나 지형 따위를 살피는 데에 쓰던 전선(戰船).

주4

왜성의 출입구.

주5

성곽 외곽에 도랑을 파서 두루는 해자와 같은 구조물.

주6

왜성에서 중심이되는 주곽인 제1곽을 두면 또는 삼면을 둘러 곽을 배치하는 형식.

주7

왜성에서 중심이되는 주곽인 제1곽의 한 면에 곽을 연속적으로 덧 붙여 배치하는 형식.

주8

모서리의 석축을 견고하게 쌓기 위하여 석재의 긴 면과 짧은 면을 교대로 하여 깍지를 끼듯 서로 맞물리게 쌓는 방법. 왜성 용어로 산목적(算木積)이라고 함.

주9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10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 우리말샘

주11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에 있는 공원. 임진왜란 때에 왜군들이 쌓은 선진리 왜성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내에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을 비롯하여 사천 해전 승첩 기념비, 공군 충령비 등이 있다. 벚꽃나무가 많이 심겨 있어 매년 봄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 우리말샘

주12

큰 돌을 깨서 만든 인공적인 자갈. 우리말샘

주13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14

평지와 산을 이어 쌓은 성. 고구려의 평양성, 백제의 사비성이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15

한 무덤 안의 여러 곽 가운데 중심이 되는 인물의 주검을 넣은 곽. 우리말샘

주16

으뜸 덧널에 딸려 있어 대개 껴묻을 거리를 넣어 두는 곳. 우리말샘

주17

울산광역시 서생면에 있는 성. 임진왜란 때 왜군이 경상도 해안에 세운 18개의 성루(城壘)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말샘

주1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맞서 싸운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 임진왜란 때의 평양성 전투와 정유재란 때의 울산 도산성 전투가 연합군의 대표적인 전투이며, 전쟁 기간에 총 22만의 명나라 군인이 참전하였다. 우리말샘

주19

선조 25년(1592) 5월에 이순신이 경남 사천에서 왜선(倭船)을 무찌른 싸움. 여기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하였다. 우리말샘

주20

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일. 또는 그 판자와 공이. 우리말샘

주21

바다의 면이나 어떤 지점을 정하여 수직으로 잰 일정한 지대의 높이. 우리말샘

주22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우리말샘

주23

벽체의 모서리에 사용되는, 기초를 닦는 돌이나 벽돌. 우리말샘

집필자
나동욱(복천박물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