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왜성(蔚山倭城)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시 중구 학성동에 쌓은 왜성이다. 1597년(선조 3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설계하고,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가 16,000명을 동원하여 40여 일만에 쌓은 왜성이다. 서쪽으로 언양 방면의 방어를 위한 태화루 부근, 북쪽으로 경주 방면의 방어를 위한 학성산의 성황당, 동쪽으로 동천(東川)과 이어진 반구정(伴鷗亭)의 구릉지 등에 지성(支城)이 있었다. 1597년 12월과 1598년 9월 사이 이곳에서 왜군과 조 · 명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울산왜성(蔚山倭城)은 1986년 발굴 조사에서 본환(本丸), 이지환(二之丸), 삼지환(三之丸) 등 3개소의 곽(郭)과, 2개소의 요곡륜(腰曲輪), 호구(虎口), 경사면을 따라 남쪽과 동쪽 외곽으로 연결된 수석원(竪石垣) 등이 조사되었다.
2011년 본환의 서남쪽 해발 7.5m 지점인 ‘울산 학성동지구 주거환경 개선사업’ 부지 내의 유적 발굴 조사에서 동북 방향의 서벽 16.25m와 이 성벽에서 남동 방향으로 꺾이는 북벽 4.25m가 조사되었다. 외벽은 석축과 잡석으로 뒷채움을 한 부분을 포함하여 너비 3.9m이며, 토축한 내면은 너비 5.2m, 잔존 높이 2.8m 규모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경사도는 50도 정도이다.
토층의 단면을 조사한 결과, 최하층에서 주혈의 단면이 확인되었으며, 목탄과 소토층(燒土層) 위에 황갈색 사질 점토로 다짐한 증축한 층이 확인되었다. 이 증축한 층은 본환과 남쪽 삼지환의 외곽을 두른 성벽으로 추정된다. 한편, 초축 층에서 성벽과 직교하는 석열이 조사되었다. 이 석열의 간격은 240cm로 분단시공(分段施工)을 한 흔적으로 보고 있다. 왜성의 성벽에서 분단시공을 한 흔적이 조사된 것은 울산왜성이 처음이라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2015년 동문지 발굴 조사에서는 동문지와 문루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기와와 철환(鐵丸), 철촉(鐵鏃) 등이 수습되었다. 문지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동서 방향의 너비는 약4m이다. 동쪽 문지돌의 경우, 전면에 '절도사신공응기선정비(節度使辛公應基善政碑)', 후면에 '〇〇만력십삼년〇〇을유십이월〇〇(〇〇萬曆十三年〇〇乙酉十二月〇〇)'이 새겨진 수군 절도사의 비석을 가져다 홈을 파서 문지돌로 사용하였다. 기록에는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성벽을 헐어 울산왜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지환에서 남쪽 200m 지점의 약사암 주변도로 부지에서도 성벽에 사용된 석탑의 부재가 확인되고 있어 성벽을 축조할 때 석재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울산왜성(蔚山倭城)은 정유재란 때 왜군이 서생포왜성 이북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597년(선조 3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설계하고,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가 10월 12일부터 16,000명을 동원하여 40여 일만에 쌓은 성이다. 공사 감독은 오다 카즈요시[太田一吉]가 맡았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이 성이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하여 시루성[甑城]이라 하였고, 성을 쌓은 산 주변이 섬과 같은 지형이기 때문에 ‘도산성(島山城)’이라고도 불렀다.
『선조실록』 1598년(선조 31) 1월과 3월의 기사를 보면, 서쪽으로 언양 방면의 방어를 위한 태화루 부근, 북쪽으로 경주 방면의 방어를 위한 학성산의 성황당(城隍堂), 동쪽으로 동천(東川)과 이어진 반구정(伴鷗亭)의 구릉지에도 울산왜성의 지성(支城)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1598년 9월 22일부터 9월 25일까지 조(朝) · 명(明)연합군이 두 차례에 걸쳐 울산왜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당시 조명연합군에 포위된 왜군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전멸 직전에 이르렀다. 군마의 피와 오줌을 마시거나, 종이나 흙벽까지 끓여 먹을 정도로 성내의 상황이 열악하였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철수령에 따라 1월 18일 울산왜성의 성채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1642년(인조 2)에 조정에서는 전함을 정박하기 위한 전선창(戰船廠)을 이곳에 두었다가 1654년(효종 5)에 개운포로 옮겼다.
울산왜성은 연곽식(連郭式)의 평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성산 꼭대기에 동서 100여m, 남북 600m 규모로 중심 공간[郭]인 본환을 두었으며, 본환의 북쪽 아래 해발 35m 지점에 동서 100m, 남북 100m 규모의 이지환을 두었고, 그 서북쪽 아래 해발 25m 지점에 동서 40m, 남북 100m 규모의 삼지환의 곽을 덧붙여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연곽식 구조를 석축한 내성과 토축한 외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본환의 동쪽과 북쪽, 이지환의 북쪽, 삼지환의 동쪽과 동북쪽 등에 출입구인 호구(虎口)가 있었으며, 망루와 같은 노(櫓) 건물도 12개소가 있었다. 노나 성벽의 상부 여장(女墻)에는 철포(鐵砲) 3백정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남쪽을 제외한 제3곽〔三之丸〕의 북 · 서 · 동쪽의 외곽 3면은 길이 1400여 칸 규모의 토루(土壘)로 둘러쌓아 목책(木柵), 해자(垓字)를 설치하는 등 3중의 방어막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조사에서 이지환의 동쪽 아래에서 토루가 확인되었는데, 이 토루는 109칸〔間〕, 너비 7칸~8칸 규모로 과거에는“나팔등”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태화강과 닿은 선입지(船入地)가 있어 배가 성 밑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성벽은 60~70도 정도로 경사지게 쌓았다. 깬 돌을 이용하여 잔돌을 끼워가며 줄눈 흐트려쌓기를 하였으며, 장방형에 가까운 석재로 쌓은 곳도 있다. 각이 진 성벽의 모서리는 깬 돌의 모서리를 맞추어 쌓은 것이 대부분이나 석재의 긴 면과 짧은 면을 서로 엇갈리게 짜 맞추는 엇갈려쌓기를 한 부분도 확인된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1,393m이고, 잔존 높이는 6〜13m 정도이다.
울산왜성은 사천왜성, 순천왜성과 더불어 왜군과 조 · 명연합군의 실제 전투가 있었던 정유재란 당시 3대 전투 현장이다. 이러한 왜성 유적은 400여년 전 우리 민족이 국난을 극복했던 장소로, 당시 치열했던 동아시아 전쟁을 재구성하고 역사를 재현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 문화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