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왜성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쌓은 왜성.
이칭
이칭
외교성(倭橋城) , 예교성(曳橋城)
유적
건립 시기
1597년(선조 30)
관련 국가
일본
관련 인물
고니시 유키나가, 권율, 유정, 진린, 이순신
높이
5~7m
둘레
3,844m
면적
788,549㎡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전라남도 시도기념물(1999년 02월 26일 지정)
소재지
전남 순천시 해룡면
내용 요약

순천왜성은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쌓은 왜성이다.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거점으로 동서 900m, 남북 850m 범위에 걸쳐 본성(本城)과 내·외성의 구조로 쌓았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벽 바깥으로는 목책을 둘러 요새화하였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왜군과 조명연합군이 전투를 벌인 곳으로 울산왜성전투·사천왜성전투와 더불어 정유재란 3대 전투의 현장이다. 정유재란 때 축조한 왜성의 축조 기법 및 변화 양상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정의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쌓은 왜성.
발굴 경위 및 결과

2001년 순천왜성의 주차장 진입로 개설 공사로 인해 외성 일부 구간이 발굴 조사 되었으며 2004년에는 왜성의 정비・복원 기본 계획 수립과 관련하여 천수각터에서 동쪽 내성의 안쪽 성벽이 조사되었다. 본성(本城)의 성벽은 경사면을 ‘ㄴ’자형으로 암반층까지 판 후 지대석 없이 길이 30~100cm, 두께 30~80cm의 석재를 이용하여 면석과 면석 사이 공간에 작은 깬 돌을 끼워 넣은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성벽 안쪽으로는 작은 깬 돌을 채워 넣어 뒤채움하였다. 잔존 성벽의 잔존 높이는 3m 정도이다. 내성에서 문지 2개소가 조사되었는데, 주차장에서 천수각(天守閣) 쪽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문지 1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지그재그 형태로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다. 문지 2는 내성과 외성을 잇는 토교(土橋) 동쪽에 설치된 것으로 동벽과 서벽을 남북 방향으로, 어긋난 구조이다. 내성과 외성 사이의 해자는 토교 남쪽부에 설치된 것으로 너비 23m, 깊이 470cm 규모이다. 성벽은 대체로 대형의 깬 돌 사이에 작은 깬 돌을 끼워 넣어 허튼층쌓기를 하였는데 70도 정도 경사지게 쌓았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단면 사다리꼴로, 문지 사이의 너비는 550cm이다. 외성의 남쪽 성벽의 경우 외벽의 잔존 높이는 약 1m, 중심부의 토축 높이는 250cm 정도이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내성과 동일한 기법으로 쌓았으며, 성벽의 너비는 약 5m로 확인되었다.

건립 경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거점 및 방어 기지로 삼기 위해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이 3개월 만에 본성과 내외성의 3중성으로 쌓았다. 조선에서는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교성(曳橋城)이라 불렀다.

변천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처음으로 고적 제80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국가 사적 제49호(승주 신성리성)로 재지정되었으나, 1996년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에 따라 일본인들이 쌓은 성이란 점에서 국가 지정 사적에서 해제되었다. 1999년 2월 26일 보호 구역을 축소하여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71호로 지정하였다.

형태와 특징

순천왜성은 동서 900m, 남북 850m 범위에 걸쳐 동남쪽은 해안과 접하여 급경사를 이루는 구릉 정상에 있는 본성(本城)과 그 서북쪽에 있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너비 13~14m, 깊이 5m 정도 규모의 해자를 설치하여 섬처럼 요새화하였고, 외성과는 토교를 설치하여 출입하였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성벽에 굴곡(屈曲)을 주었고 내성과 외성 3곳에는 치상유구(雉狀遺構)를 설치하여 측면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문지는 대체로 승형호구(桝形虎口)라 하여 사각형의 옹성과 같이 만들어 적이 곧바로 성내에 진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순천왜성의 전투 장면이 그려진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는 굴곡지게 쌓은 석축 성벽 위에는 상하로 구멍이 뚫린 여장을 두어 조총을 쏠 수 있도록 하였고, 성벽 바깥으로는 이중으로 목책과 일정한 간격으로 치(雉)와 같은 임시 구조물을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성 내 장수의 지휘소인 천수각에는 “五層望海樓(오층망해루)”라고 쓰여 있어 5층 규모의 천수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천왜성의 천수각터는 다른 왜성과 달리 모서리에 치우쳐 있지 않고 별도의 석축으로 둘러져 본성의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길이 18m, 너비 14m, 높이 6m 정도로 그 상부에는 거리가 2m 정도인 주초석(柱礎石)들이 남아 있다. 문지나 천수각 주변 성벽은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조금 휘어지다가 맨 윗부분에는 약간의 수직선을 이루게 하였다. 특히, 호구(虎口)나 천수대(天守臺)의 모서리 부분이나 문지 주변 성벽은 성벽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석재의 긴 면을 서로 엇갈리게 쌓는 독특한 축성 방법이 사용되었다.

의의 및 평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연합군은 서로군 · 중로군 · 동로군으로 육로군을 편성하여 수로군과 함께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의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개시하였다. 이에 따라 1598년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과 명의 육군 장수 유정(劉綎)이 이끄는 육군 36,000여 명, 조선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중국 명의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수군 1만 5000여 명의 조 · 명 수륙 연합군과 순천왜성 주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3700여 명의 왜군이 두 차례에 걸쳐 최후의 대규모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정유재란 때에 축조한 왜성으로 임진왜란 때 축조한 다른 지역 왜성과 함께 일본의 근세 초창기인 쇼쿠호우기[織豊期, 1568∼1600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전통 석축 성곽의 축조 기법 및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順天 劍丹山城과 倭城』(順天大學校博物館·順川市, 1997)
『順天倭城의 外城 遺蹟』(순천대학교박물관, 2001)
『順天倭城 - 試 ・發掘調査報告書』(전남대학교박물관, 2006)

논문

천득염, 「순천 왜성의 구조와 축성기법」(『순천 검단산성과 왜성』, 순천대학교박물관, 1997)

인터넷 자료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집필자
나동욱(복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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