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포 성지는 조선 전기에 축조한, 경상 좌수영 소속 수군 진성으로,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에 있다. 이 성은 해발 60m 정도의 구릉 지대와 외황강과 접해 있는 저지대에 축조된 평산성으로, 성내 골짜기를 두고 있는 둘레 1,264m의 포곡식 석축성이다. 개운포 성지에 대한 수차례의 시·발굴 조사에서 추정 객사터와 북문지와 동문지에서 옹성문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벽과 치성, 해자, 수구, 선소 등의 성곽 부속 시설도 확인되어, 조선시대 수군 진성 축조 수법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개운포 성지는 동해로 흘러드는 외황강의 하류에 위치한다. 해발 60m 정도의 구릉 지대와 외황강과 접해 있는 저지대에 축조된 평산성으로 성내 골짜기를 두고 있는 포곡식 석축성이다. 상공에서 보았을 때 서북쪽 성벽선이 직선을 이루고 나머지 방향은 타원형을 이루는 부정형의 평면을 보인다. 성내에는 생활에 편리한 평탄지와 계곡이 있다. 성지 남서쪽에는 바다로 돌출된 곶부리가 있으며, 수심 3m 내외의 외황강이 흘러 동해로 유입된다. 인근에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바다를 감시할 수 있는 하산 봉수가 있다. 이는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축조되어 있어 바다에서 하천을 통해 내륙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개운포 성지에 수군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1407년(태종 7)의 "개운포 병선을 거느리고 삼포‥"이다.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1411년(태종 11)의 "‥개운포 만호 조민노가 바다의 적을 막을 만한 재질을 갖추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의 직첩을 박탈한다.‥"라는 기사이다. 그리고 『경상도지리지』에 보면 1425년(세종 7)에도 개운포 만호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93년(성종 24)년에 "경상좌도수영이 본래 동래현 부산포에 있었는데 국가의 주장이 왜인과 혼처하고 있어 거처로서 마땅하지 아니하여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개운포 성지는 조선 태종 때 이미 있었으며, 1493년 동래에 있던 경상 좌수영이 개운포로 이전되면서 기존에 개운포 성지가 있던 포구에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운포 성지는 태종∼ 세조까지는 만호진으로 운영되다가 1459년(세종 5)에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어 1534년(중종 29)까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운영되었다. 경상 좌수영이 울산 개운포로 옮겨진 이후, 울산은 병영과 수영이 함께 설치되어 지휘 체계가 애매해지고, 또 거주민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따라서 경상 좌수영을 부산포나 다대포로 다시 이설하는 문제가 1460년(세조 6) 이전부터 수차례 논의되었다.
1475년(세조 3), 정월 개운포는 바다에 가까이 있고 백성과 산물(産物)이 많으며, 고기를 낚는 왜선(倭船)이 자주 염포를 경유(經由)하여 지나가게 되니, 수호(守護)를 또한 오로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염포진에 이속시켜 군비를 보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476년(세조 4) 11월에 개운포 성지가 염포(鹽浦)와 서생포(西生浦)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해로(海路)가 굽고 먼 데다가 또 도절제사영과 거리가 멀고 염포에 사는 왜인들이 항상 왕래하고 있으니, 방어(防禦)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하여 다시 설치되었다.
중종 대 경상 좌수영을 동래 해운포로 옮기려는 문제는 1511년(중종 6) 순찰사 고형산(高荊山)이 제기하였는데, 반대 여론이 나오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 이유로는 해로상 경상 좌도 연변의 중간 지점인 부산으로 이전하면 영해(寧海) 방면의 방어가 허술해진다는 것과 부산포는 왜인이 왕래하고 있으므로 주장이 여기에 있으면 그 허실이 탐지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경상 좌수영 소관의 재산 이동이 곤란하다는 것과 부산포가 지리적으로 협소하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경상 좌수영이 동래 지역으로 이설된 시기에 대하여 『동래영지』, 『영남영지』, 『여지도서』 등에서는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울산읍지』, 『징비록』, 『대동지지』 등을 근거로 1592년(선조 25)에 이르러 동래 해운포(남촌)로 옮겨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종실록』 29년 9월 임진 조에는 부산포를 경상 좌도의 수영으로 삼게 한다는 기사와 『중종실록』 39년 9월 임술 조에 수영이 해운보에 있음을 전하고 있어, 1534년(중종 29) 9월 29일에서 늦어도 1544년(중종 39) 9월에는 이설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인 1629년 개운포 성지는 동래 부산포 인근으로 진을 옮겼으며, 1656년(효종 7)에 도산에 있던 전선소(戰船所)가 이곳으로 옮겨와 1895년(고종 32) 만호진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로 인해 이곳 마을 이름도 선소 마을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동안 추정 서문지 지역에 선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추정 서문지 일대 앞에서는 6.5m 이격하여 추정 해자(垓字)가 확인되었고, 서벽 성벽 몸체부 아래 수구(水口)가 확인되어 선창지로는 부적합함이 확인되었다. 다만 1954년 촬영된 국토지리정보원의 항공 사진을 보면 성암동 추정 남문지 부근 남쪽이 지금은 산업 도로로 단절되었으나, 자라 목처럼 튀어나온 지형의 동쪽과 서쪽 편이 만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쪽 만에는 선수 마을이 있었고 ‘선수’는 ‘선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형적으로 보나 지명으로 보나 이 지역에 선소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2년부터 2018년까지 개운포 성지를 대상으로 4차례의 시 ·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동문지 · 북문지 · 추정 서문지 · 추정 남문지 · 추정 객사(客舍)지 · 성벽과 치성(雉城) · 해자(垓字) 등이 조사되었다.
동문지는 성지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동쪽 구릉에 위치하며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확인되었으며, 기와편이 많이 수습되어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문지의 경우 개구부가 서쪽으로 난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으로 조사되었다. 문지는 개구부 너비가 2m 정도였으나, 후대에 좁힌 것으로 조사되었다. 북문 옹성의 경우는 기존 옹성의 외측부에 약 1.5m 정도 확장하여 증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추정 서문지의 경우, 조사 결과 길이 70cm, 너비 50cm 규모의 수구가 조사되어 문지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추정 서문지 주변 성벽의 경우 처음 쌓은 성벽의 석축 너비는 3m, 잔존 높이 260cm 정도이며, 증축(增築) 성벽은 너비 5m, 잔존 높이 360cm이다. 성벽 북측 경사지에서는 기단을 계단식으로 수평화하면서 쌓은 성벽이 확인되었다.
추정 남문지에서는 문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추정 남문지의 경우 바닥에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너비 6.2m 정도로 지대석(地臺石)을 한 벌 깐 후, 지대석 끝에서 안쪽으로 20cm 정도 들여서 성벽의 기단석(基壇石)을 설치하였다. 잔존 외벽은 3∼4단의 성벽석을 세워 쌓기와 눕혀 쌓기 방법으로 쌓은 후, 깬돌로 뒤채움한 상태이다. 외벽과 내벽의 너비는 4.8∼5m이다. 내벽은 30∼40cm 크기의 깬돌로 높이 80cm까지 쌓았으며 내벽 바깥쪽에는 성벽 기초부를 보호하기 위한 40∼120cm 너비의 보축석(補築石)이 깔려 있다. 뒤채움석 상부와 안쪽으로는 황갈색 흙과 풍화토를 번갈아 교대로 다져 덮었다. 외벽의 안쪽 약 2.5m 지점에서 뒤채움석이 단을 지고 있으며, 외벽석으로부터 1.5m 안쪽에서 상부에 덮였던 흑갈색 부식토가 수직으로 잘린 흔적이 있어 후대에 보수나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추정 객사지 지역은 개운포 성지 내의 독립 구릉의 남쪽에 위치하는 평탄 대지로 동쪽으로 동문지와 연결되며, 서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지역이다. 이곳은 ‘객사등들’이라는 지명이 유래되고 있다. 시굴 조사에서 건물지와 구덩이, 기둥 구멍, 석축 등이 확인되었다.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다수 수습되어 객사 및 동헌 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추정 서문지와 남문지 사이에서 성벽과 함께 조성된 치성도 확인되었다. 남서벽 치성의 경우 규모는 가로 6.5m, 세로 8m이다.
해자의 경우 북문지 동편 해자는 자연 경사면을 최대한 이용하여 깊이 6m 이상으로 파서 만들었다. 서편 해자는 동편보다 얕으나 성벽에서 약 10∼15m 이상 떨어져 있어, 너비 10m 정도의 단면 브이(V) 모양의 해자가 양호하게 남아 있다. 한편, 남쪽 성벽의 외벽에서 7.2m 바깥 지점에서도 너비 4.5∼5m, 잔존 깊이 1m 규모의 단면 유(U) 모양의 해자가 확인되었다.
성내 및 인근에 성암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건축 행위가 빈번히 이루어졌고, 주변에 공장 부지도 함께 조성되면서 성벽과 내부 지형들이 일부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현재는 울산광역시에서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대부분 철거한 상태이다. 성지 내부 대부분은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어 지형의 변화와 유적의 구조에 변형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벽을 비롯한 문지, 치성, 해자, 건물지 등의 기초부는 대부분 잘 남아 있다.
개운포 성지는 조선 전기 경상 좌수영 소속의 수군진으로 1459년(세종 5)에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어 1534년(중종 29) 즈음까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운영된 성이다. 발굴 조사에서 석축 외벽 면석 안쪽에 잡석을 단상으로 채운 뒤 그 안쪽을 토사로 다진 내탁 형식의 성벽 축조 수법과 성벽의 증축 과정에서 확인된 축조 수법 · 기단 수평화 기법 등은 수군진성 성벽의 축조 수법 변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2024년 8월 7일 성지와 그 주변을 아우르는 문화유산구역 91필지 34,564.7㎡와 문화유산보호구역 122필지 89,763.7㎡를 국가유산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성곽의 잔존 상태나 보존 환경이 타 지역 영 · 진성에 비하여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어 사적으로서의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