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왜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코바야가와 타카카케 등이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 쌓은 왜성이다. 낙동강 수로의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김해 죽도왜성의 지성으로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3년 7월 코바야가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를 최고 책임자로 한 5명의 무장(武將)이 협력하여 2달 보름 정도 만에 완성하였다. 북쪽 해발 75.7m 야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9개의 곽(郭)으로 이루어진 내성과 내성의 남쪽 해발 36.5m 구릉 정상부를 장방형의 이중 해자로 둘러싸고 있는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포왜성은 내륙의 가장 서쪽 낙동강 본류 변에 위치한 왜성이다. 임진왜란 때 낙동강을 건너 서쪽에 있는 김해왜성의 지성(支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류 쪽으로는 양산천을 따라 언양과 경주 등지로 통하는 길목의 호포왜성, 그리고 정유재란 때 쌓은 물금 증산왜성과도 연계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서장(書狀)을 통하여 1593년 7월 상순 코바야가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를 최고 책임자로 하여 그의 동생 코바야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包〕,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그의 동생 타카하시 나오쯔쿠〔高橋直次〕, 치쿠시 히로카도〔筑紫廣門〕 등 5명의 무장(武將)이 협력하여 축성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바야가와 타카카게에게 보낸 주인장을 보면 9월 25일경에는 구포왜성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구포왜성은 2달 보름 정도 만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1595년(선조 28) 6월 말경에는 강화 회담의 진전에 따라 왜군은 경상남도 일대의 왜성을 파괴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는데, 1595년(선조 28)년 7월 8일부터 3차에 걸쳐 실시할 예정이었다. 1595년 8월경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복병장(伏兵將)으로서 양산(梁山) 구법곡(구포왜성)에 진영을 옮기고 명나라 사신을 기다려 모두 바다를 건너갈 것이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구포왜성도 이때 폐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597년 1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양산왜성을 쌓아 부산포 방위의 범위를 더 북쪽으로 확장시켰는데, 전쟁의 국면이 한층 악화되어 울산왜성, 양산왜성, 순천왜성 등의 최전선 기지를 지탱하는 것이 곤란한 상태였다. 결국 양산왜성은 부산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점에서 수비하기 곤란하였다. 이에 1598년 3월 하순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등에 의하여 구포왜성의 수축 공사가 완료되었고, 양산왜성에 있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구포왜성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이때 수축한 왜성이 현존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선조실록』 1598년(선조 31) 8월 23일 기사에 경상 관찰사 정경세(鄭經世)가 치계하기를 「…구법곡(구포왜성)의 적이 서생포로 옮겨간 것은 매우 확실한데…더욱 정탐케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어 쿠로다 나가마사가 서생포왜성으로 옮겨 가면서 구포왜성은 1598년 8월 이전에 이미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구포왜성은 입지와 규모상으로 볼 때 크게 북쪽의 내성〔本城〕과 남쪽의 외성(外城)으로 나눠지며, 내성은 세부적으로 주곽부(主郭部)와 외곽부(外郭部)로 나눠볼 수 있다. 내성의 주곽부는 해발 75.7m의 야산의 주봉 정상부를 중심으로 주곽을 설치하고 주변 지형을 따라 사면을 삭토하면서 제1곽에서 제4곽까지 모두 4개의 곽(郭)을 단상(段狀)으로 둘러 배치하였다. 주곽부의 평면 배치 형식은 제1곽을 중심으로 제2곽과 제3곽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에서는 윤곽식(輪郭式)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곽부 동남쪽의 수석원과 인접하여 서쪽으로는 제5곽, 제6곽, 제7곽, 제8곽, 제9곽을 연결하면서 내성의 외곽부를 구성하고 있어 상단 곽의 아래쪽으로 곽(郭)을 붙여 가면서 배치하는 제곽식(梯郭式)으로도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내성에는 두 형식이 공존하는 복합 형태를 보이고 있다.
내성의 남쪽에 위치하는 외성에서는 해발 36.5m로 남북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구릉 정상부를 이중의 구상 유구(溝狀遺構(空堀))가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상 유구의 남쪽으로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지형상 내성부의 주 통로가 있는 서쪽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외성부의 편면 배치는 외성의 동 · 남 · 서쪽으로는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곽의 배치가 어려운 실정이므로 윤곽식(輪郭式)으로 볼 수 있다.
구포왜성은 다른 왜성에 비하여 해자가 많이 설치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가장 확실하게 구분되는 해자는 제4곽의 동북쪽에 북쪽 능선과의 단절을 위해 설치된 굴절이다. 굴절의 규모는 저부 너비와 깊이가 약 5m 정도이다. 이 굴절은 수월암 뒤편 제4곽의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4곽의 서쪽 수석원의 외곽에도 굴절로 보이는 골짜기가 있다. 구포왜성의 내성에서 해자가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것은 북쪽 금정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의 일부를 차단하면 독립된 지형이 되고 전망이 용이한 남쪽으로는 낙동강변이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2002년 2월 26일부터 2022년 8월 24일까지 구포왜성의 외성 일부 구간을 조사하였다. 발굴 조사에서 왜성과 관련되는 내용들은 해발 36.5m의 구릉 정상부를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구상 유구(溝狀遺構)를 비롯하여 그 위에 조성된 토루(土壘), 그리고 그 내 · 외부에는 각종 굴립주(掘立柱) 건물지와 호구(虎口), 화장실로 추정되는 수혈 유구, 굴절(堀切) 등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구상 유구는 비교적 경사가 급한 서쪽에 1줄이, 경사가 완만한 남쪽과 동쪽 사면에서는 등 간격의 2줄이 확인되었는데 원래 2줄의 이중 구조로 보인다. 구의 잔존 규모는 너비 240cm, 깊이 110cm 정도이며, 단면은 V 모양이다. 동남쪽 외곽의 구는 토교(土橋)로 단절되어 있어 출입구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문지의 남동쪽 외곽에는 정상부 구의 진행 방향과 직교되는 구가 확인되는데 적의 수평 이동을 차단하는 수굴(竪堀)로 보인다. 따라서 외성부의 동남쪽은 문지나 수굴이 존재하고 구릉 하단부의 굴립주 건물지와 연결되어 있어 외성부에서 선착장으로 출입하는 통로로 추정된다. 한편, 구상 유구 안쪽 상부에는 흙을 판처럼 얇게 다졌으며, 동남쪽 모서리에서는 잔돌로 뒤채움 한 석축 성벽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초축 당시의 구상 유구가 폐기되고 난 후 어느 시기에 구상 유구를 다시 메우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굴립주 건물지의 경우, 외성 서편 낙동강 쪽 구상 유구의 외곽 사면 아래에서 대규모로 확인되었다. 앞면 8칸, 옆면 1칸 규모이며, 기둥 간 간격은 정면 200cm 내외이다. 정상부의 경우 구상 유구 내부에서 9동이 확인되었는데 4동이 서로 중복되어 어느 시기에 건물이 수축(修築)된 것으로 보인다.
외성의 구상 유구에서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편, 조선시대 분청사기편, 지석편, 기와편, 스리바치〔擂鉢〕편 등이 출토되었다. 일본 전국시대의 조리 용기인 스리바치는 일본 쇼쿠호우기〔織豊期, 1568∼1600〕 세토 · 미노요〔瀨戶ㆍ美濃窯〕 것과 닮았다. 스리바치는 기장왜성과 서생포왜성 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왜군의 식생활 용기로서 주목된다. 한편, 기사년(己巳年)명 수키와가 수습되었는데 동래왜성의 내성이었던 동장대 정상부에서 수습된 것과 같은 것이어서 왜군이 조선의 기와편도 왜성 내 건물 조영에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포왜성의 성벽 축조 수법은 자연석과 깬돌을 이용하여 잔돌을 끼워 가면서 쌓는 기법으로 틈이 없도록 축조하였는데 외벽은 면을 맞추어 축조하고 그 안쪽에 직경 10cm 크기 내외의 속 채움석을 다져 넣어 쌓았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약 1.5∼7m 정도이며, 3∼12단의 석축이 약 65~70도의 경사를 유지하고 있어 이 시기 다른 지역 왜성의 기울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성벽의 모서리 축조는 대부분 각석과 각협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각석 겹쳐 쌓기로 하였으며, 주곽의 서북쪽 노대 모서리 축조에 있어서도 각석과 각석 사이에 자연석이나 깬돌의 고임돌을 쓰고 있어 일본의 천정(天正, 1573∼1591) · 문록년간(文祿年間, 1592∼1596)의 축조 수법과 일치하고 있다. 일본의 성곽 발달사에 있어서 성곽 축조 수법의 큰 변화가 생기게 된 시기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기로 보고 있는데 구포왜성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