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성은 통일신라시대 전후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이다. 남해도의 평산포 북쪽에 뻗은 낮은 구릉에 위치한 석축 산성으로, 발굴 조사에서 통일신라 전후 성벽의 축조 기법이 확인되었고, 성벽과 건물지, 집수지, 다수의 투석용 몽돌이 확인되었다. 성내 건물지, 집수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전후 시기의 토기편과 기와편, 청자편,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임진성은 통일신라시대 전후에 왜구에 대비하여 처음 쌓은 것을 고려·조선시대에도 계속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2014년에 북쪽 성벽과 성내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다. 북쪽 외벽에서 높이 약 1m 정도까지의 하단부는 길이 15∼45㎝, 두께 5∼20㎝의 장방형 깬돌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그 위 상단부는 하단부와 같은 성돌과 깬돌을 혼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면서 작은 돌로 성벽 면석과 벽석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운 성벽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최상부에도 허튼층쌓기를 한 수축 성벽이 확인되었다. 하단부의 성벽은 통일신라시대 전후에 쌓은 성벽의 특징을 보인다. 외벽의 바깥 기저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에 덧대어 쌓은 너비 2m의 추정 기단보축(基壇補築)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삼국시대 성벽의 특징이다.
한편, 북쪽 성벽 내벽에서부터 약 5~6m 지점 안쪽에서 석열과 기와편, 구덩이와 기둥 구멍, 주거지, 집수지 등과 석환(石丸)도 다수 확인되었다. 이를 조사한 발굴 조사단에서는 이를 석축 성벽 안쪽으로 채운 토축부로 판단하였다. 집수지 인근에서 조사된 주거지의 경우 길이 356㎝, 너비 270㎝, 잔존 깊이 38㎝ 규모의 장방형으로 주거지 내에서 기둥 구멍 2개와 아궁이 시설이 확인되었다. 물을 모아 두는 집수지는 평면 원형의 3단 석축 구조로, 규모는 직경 9m, 잔존 깊이 2.6m 정도이다. 성내 건물지와 집수지에서는 7세기 통일신라시대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개(蓋)와 대부완(臺附碗), 대각(臺脚)편, 고려시대의 광구호편(廣口壺片), 대호편(大壺片) · 소호편(小壺片), 청자편, 조선시대의 기와편과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성벽의 축조 기법과 출토 유물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전후에 처음 쌓은 성을 고려 · 조선시대에도 계속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곽이 입지한 곳은 고대로부터 남해안 일대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는 길목으로 조선시대 해로를 감시 및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된 경상 우수영 소속 평산진성이 있는 평산만과 주변 옥포만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성의 동쪽 평산진에서 남해현으로 통하는 육상 교통로인 고갯길이 있어 이에 대한 감시와 통제도 고려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의 축조 수법과 출토 유물의 특징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 전후 이곳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근 상가리 마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성은 민보성(民堡城)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에 왜적을 막기 위하여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쌓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임진성은 조선 초기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어 권관(權管)이 파견되어 지켰던 곳이었으나 16세기 중엽 이후 유사시 지방 주민들의 피난용 산성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성루(城樓)를 비롯하여 훈병사(訓兵舍), 삼시사(三試舍), 망대(望臺), 서당(書堂), 우물 등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출토 유물을 통해서 볼 때 통일신라 이후에도 시대적 요구 상황에 따라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동문 터와 남쪽 성벽 173m가 정비되었다.
해발 108.1m의 기왕산 제2봉 정상부를 따라 북쪽 성벽은 직선형, 남쪽 성벽은 곡선형을 보이는 평면 타원형의 테뫼식 산성이다. 남해도의 평산포 북쪽에 뻗은 낮은 구릉에 50cm 크기의 얇은 돌을 이용하여 둘레 286m 정도의 비교적 작은 규모로 쌓았다. 하단부 성벽과 추정 기단 보축, 성내 집수지는 7세기를 전후한 통일신라시대 산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상단부의 석축은 고려시대, 최상단의 석축은 조선시대에 수리한 성벽으로 보고 있다.
임진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하여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쌓았다 하여 민보성(民堡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성벽과 성내 건물지, 집수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통일신라 전후의 유구와 유물, 투석용 몽돌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이 시기 처음 왜구에 대비하여 쌓은 산성으로 밝혀졌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 · 조선시대에도 그 기능을 면면히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남해 지역 성곽 축성사를 연구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