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왜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쌓은 왜성이다. 이곳은 회야강과 포구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의 수송이 용이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중 왜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평산성(平山城)으로 1594년(선조 27)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한 곳으로,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왜성으로 사용되었다.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왜성으로 16세기 말기의 일본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서생포왜성은 입지상으로 평산성(平山城)에 해당된다. 해발 133m 일원에 소재하는데, 동서 870m, 남북 370m 정도의 규모이다. 곽(郭)의 배치는 주곽인 본환(本丸)을 중심으로 곽을 붙여 나가는 제곽식(梯郭式) 성곽으로 분류된다. 공간 배치상 산지의 중심 공간인 본환(本丸), 이지환(二之丸), 삼지환(三之丸) 또는 내성, 중성, 외성의 3단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크게 산지의 내성과 평지의 외성 공간으로도 나눌 수 있다.
외성인 가장 아래쪽 삼지환의 공간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마을 동쪽에는 높이 약 10m에 이르는 2단의 경사진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본환에서 이곳까지 남쪽과 북쪽에는 약 60∼70도 정도의 기울기를 가지는 4∼6m 높이의, 길이 300m 정도의 수석원(竪石垣)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지환 인근 남쪽과 북쪽의 수석원 성벽에는 조선 성의 치(雉)와 닮은 치상유구(雉狀遺構)가 설치되어 있으며, 수석원의 바깥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삼지환에서 이지환(二之丸)으로 들어서는 곳에는 문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남쪽 수석원을 따라가다 보면 서쪽에서 성내로 들어오는 승형호구(枡形虎口)가 있는데, 옆면에는 소규모 곽(郭)을 조성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곳을 지나 동쪽으로 오르면 해발 133m 높이의 본환 문지에 이른다. 본환은 동서 장방형의 성벽을 두르고 있으며 내부에는 천수각(天守閣)이 있었던 자리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 천수각터는 본환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데 남북 18m, 동서 17m, 높이 5m 정도의 규모이다. 초석 등은 남아 있지 않지만 3층 규모의 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천수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아직도 잘 남아 있다.
본환의 북쪽과 서쪽으로도 문지가 있는데 원래의 문을 폐쇄하거나 내부를 가로지르는 성벽을 내어 달아 통로를 복잡하게 한 증축의 흔적이 확인된다. 조선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1934)에 의거하여 1938년 고적 85호 ‘서생포성’으로 지정되었다. 광복 이후인 1963년에도 사적으로 재지정되어 그대로 유지되다가, 1997년 1월부터 사적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국가유산청의 권고로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민속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 수군 만호진(水軍萬戶鎭)을 함락시킨 후, 이곳과 인근 숙마성에서 가져온 돌로 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회야강과 포구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의 수송이 용이하므로 임진왜란 · 정유재란 기간 중 왜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북쪽의 울산왜성과 남쪽의 임랑포왜성, 기장왜성, 동래왜성과 더불어 부산왜성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강화 교섭이 활발하게 진행된 1594년(선조 27) 4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서생포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하기 위하여 입성하였을 때 성내에 장수의 지휘소인 천수각과 그의 거처인 화려한 어전(御殿)이 있었다는 것이 『분충서난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때 약 7,000명의 왜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다시 가토 기요마사군이 주둔하였고, 그의 부장 아사노 요시나가〔淺野慶長〕가 이곳을 수비하면서 본환(本丸)을 수축하였다. 1597년(선조 30) 12월 22일 57,000명의 조 · 명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왜성에 입성하였고, 1598년(선조 31) 1월에는 고립된 울산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왜군 2만여 명이 이 성으로 집결한 적이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울산왜성의 수비 책임자로 명령받은 1598년(선조 31) 1월 22일에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시마즈 타다토요〔島津忠豊〕등 6명의 왜장이 서생포왜성을 지키며 수비 강화를 위한 성곽의 개수 작업을 하였다. 1598년(선조 31) 5월부터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철군하기 직전까지는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수비하고 있었으며, 11월경에는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쿠로다 나가마사가 철수한 뒤 조 · 명 연합군의 명장 마귀제독(麻貴提督)이 입성하였다.
왜군이 철수하면서 서생포왜성을 쌓을 때 동원된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 쿠마모토성〔熊本城〕을 쌓는 데 동원하였다고 한다. 그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후손들 가운데 「서생」이라는 성씨로 구마모토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성내에는 왜란 후인 1599년(선조 32)에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53명의 충신 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신 창표당(蒼表堂)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지역을 시굴 조사 한 결과 초석과 기단 등을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재 창표사가 복원되어 있다.
한편, 성 밖 동제당(洞祭堂)에는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마귀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마을의 주관으로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동문 바깥에는 명에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여생을 보낸 편장군의 후손들이 편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11년 서생포왜성 내 창표당 부지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왜성 관련 유구는 2단계에 걸쳐 조성되었다. 1592년(선조 25) 7월부터 1593년(선조 26)까지의 초축 단계에는 1구역 고상건물지(高床建物址) 1·2호, 주혈군(柱穴群), 2구역 기단건물지(基壇建物址) 1호와 고상건물지 5·6호, 수혈(竪穴) 2호가 조성되었다. 1구역 고상건물지 1·2호의 경우 주혈 사이의 간격은 남북 2m, 동서 4.8m로 모두 정면 열 칸, 옆면 남북 외측 두 칸, 내부 한 칸으로 조성되었다. 고상건물지 외측에는 평면 ‘⊓’ 형태의 구(溝)를 조성하여 건물지 2동(棟)을 한 공간으로 구획하고 있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1구역 주혈군도 직경 40cm의 수혈을 파고 내부에 지름 20cm 내외의 목주를 세우고 있어 고상건물지 1·2호와 같은 고상건물지의 구조로 구축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구역 고상건물지 5호의 경우는 정면 열 칸, 옆면 세 칸의 건물지로 기둥 간 거리는 남북 약 2m, 3열과 4열은 2.1m로 조사되었다.
서생포왜성이 초축된 이후부터 정유재란까지의 증축 단계에는 1구역의 고상건물지 1·2호와 2구역의 기단건물지 1호가 수축(修築)되고, 우물 1호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대부분 초축 시 조성된 유구들을 수축, 재사용하여,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수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증축 단계에 보강된 주혈은 기존의 주혈 간격과 거의 일치하는 2m 내외이며, 깊이도 70~100cm 범위여서, 목주 조성 패턴이 초축된 고상건물지 1·2호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2구역 우물 1호의 경우 지름 2.4m의 평면 원형의 수혈을 파고, 지름 30cm 내외의 할석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내벽면을 맞추어 쌓았다. 조사된 우물의 내면 지름은 84cm이며, 잔존 깊이는 70cm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는 장축을 남북 방향으로 하는 너비 140cm 정도의 구(溝)가 확인되었다. 한편, 우물의 남동쪽에서 백자 접시와 옹기편이 집중적으로 확인되었으며, 대석 상면 북서쪽에서는 구포왜성, 기장왜성 등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는 조리 기구인 스리바치〔擂鉢,すりばち〕편이 출토되었다.
한편, 2019년 서생포왜성 성벽 보수 구간 내 표본 조사에서 성벽의 단면을 조사한 결과, 성벽은 큰 돌 사이에 할석을 끼워 넣는 허튼 층 쌓기로 축성되었다. 기저부는 암반층을 정지한 후 점성이 강한 사질 점토로 채우고 기초석을 쌓았다. 외벽 면석 안쪽의 뒤채움부는 작은 크기의 깬돌로 채우고 수평에 가깝게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뒤채움석의 두께는 하부 약 2.7m, 중앙부 약 1.5m, 상부 약 2m이다. 또한 경사지의 성벽 축조 방식이 확인되었는데, 외벽과 깬돌로 뒤채움 하여 기저부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 형태의 구조를 이루며 반복되게 다졌다. 이런 축조 방식이 울산왜성 본환 북문지 일대 성벽 단면에서도 확인되었다.
2017년 서생포왜성 주차장 조성 사업 부지 내 유적에서는 해자 2개소가 확인되었다. 해자는 성벽의 진행 방향과 나란하게 동서 방향으로 성벽 기초석에서 0.85m 정도 떨어져 조성되었다. 선축 해자와 후축 해자로 나누어지는데, 후축 해자는 선축 해자의 남쪽 외벽 일부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또한 후축 해자를 다시 파괴하고 들어선 또 하나의 해자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해자의 길이는 18.123m, 너비는 선축 해자와 후축 해자를 모두 합하면 8.4~9.2m 정도이다. 선축 해자와 후축 해자의 단면 형태는 완만한 브이(V) 모양이나 후축 해자를 파괴하고 축조한 해자는 단면이 유(∪) 모양이다. 규모는 선축 해자가 너비 2.3m, 잔존 깊이 1.5m, 후축 해자가 너비 6m, 잔존 깊이 2.3m, 또 하나의 해자는 너비 5.8m 잔존 깊이 1.6m이다.
서생포왜성은 1594년(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카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서생포왜성은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진성으로 사용되었다.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왜성으로 16세기 말기의 일본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