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진성은 강서구 천성동에 축조한 조선시대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진성이다.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등을 겪으면서 수군 증강을 위해 경상우수영 관할의 여러 진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1544년(중종 39)에 석축으로 쌓은 평지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이 긴 직사각형으로 전체 둘레 848m, 성벽 너비는 5m, 잔존 높이 4m 정도 규모이다. 초축 이후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성벽을 확장하였고 북·남·동쪽에는 옹성(甕城)을 두른 문지와 문지 좌우와 성벽 중간 중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성(雉城)을 두었고 성벽 바깥에 해자를 둘렀다.
천성진성 문화유산 복원 정비를 위하여 복원 정비 계획에 따라 2016년 북문지 일원 시굴 조사를 시작으로 2022년까지 5차에 걸쳐 시 ·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옹성(甕城)문지와 성벽 및 치성(雉城) · 포루(鋪樓) · 해자(垓字) 등의 부속 시설물과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북문지와 남문지의 옹성의 구조가 확인되었고, 북문지의 경우 원형의 옹성에서 성벽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각형의 옹성으로 개축된 것을 확인하였다. 북벽 및 동벽에서 확인된 성벽은 지대석에서 20cm 정도 안으로 들여 성벽의 기단석을 배치하였고 기단석 안쪽으로는 깬 돌로 뒤채움하였는데 외벽에 순차적으로 덧대어 쌓는 3단의 계단식 내벽이 확인되었다. 1438년(세종 20)에 정한 읍성의 축조의 기본 법식인 「축성신도(築城新圖)」의 내용이 수군진성에도 적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건물지 동편에서는 너비 550cm 규모의 대형의 등성(登城) 계단지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치성의 경우 평면 사각형으로 성벽과 동시에 축조되었으며 규모는 길이 6m, 너비 490cm, 잔존 높이 320cm이다. 치성과 연접된 성벽 상부에서는 바닥에 와전(瓦塼)이 깔린 정면 1칸∼2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건물지 위치는 성 내부뿐만 아니라 거제와 진해만 방향이 양호하게 조망되므로 장대(將臺)의 기능을 겸한 포루로 추정하였다. 해자는 초축의 동쪽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18m 떨어진 곳에서 너비 5m, 잔존 깊이 1m 규모가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아사(衙舍)터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객사(客舍)터, 월대(月臺), 회랑 구조의 건물지, 담장과 축대 등이 확인되엇다. 성내 동남쪽에서 확인된 객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로 객사 뒤쪽으로 이어지는 회랑과의 공간 배치 상황으로 보아 정면 5칸이었던 것이 남쪽으로 1칸 증축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객사 앞쪽에는 월대로 추정되는 공간이 확인되었는데, 바닥에 얇은 돌이 깔리고 북쪽 일부에서는 그 위에 깔린 와전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 북문지에서 가정 18년(嘉靖十八年, 1539)이 적힌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천성진성 축조 이전의 건물에 쓰였던 기와가 재사용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북문지에서 마름쇠가 수습되었고, 건물지 주변에서 조선시대 두정갑(頭釘甲)의 갑찰편 560여 점과 투구편,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해발 459.4m의 연대봉에서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구릉 말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천성항의 동쪽에 위치한다. 석축으로 쌓은 평지성으로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이 긴 직사각형이다. 전체 둘레 848m, 동서 성벽 간 거리 190m, 남북 성벽 간 거리 230m로 성벽 너비는 5m, 잔존 높이 4m 정도 규모이다. 초축 이후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성벽을 확장하였다. 확장한 성벽은 동서 성벽 50m, 남북 성벽 150m 규모이다. 북 · 남 · 동쪽에는 옹성을 두른 문지가 남아 있다. 문지 좌우와 성벽 중간 중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성을 두었다. 지표상에서 성벽 외곽으로 일정한 거리에 구(溝)처럼 낮은 저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성 밖에는 해자를 두른 것으로 보인다. 〈군현지도, 1872년, 규장각 소장〉 중 천성진지도에는 진성 내 우측에 객사, 좌측에 아사 등의 내부 시설물들과 4대문이 표현되어 있다.
천성진성은 1544년 축조된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진성으로 동쪽 가덕진과 함께 진해만 연안 방어의 최일선이었다. 남해안 일대 조선시대 수군진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으며 성벽도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객사지 발굴 조사에서 조선 후기 두정갑 편 560여 점이 출토되어 동래 읍성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 찰갑과 함께 갑옷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