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죽도성 ( )

건축
유적
국가유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쌓은 왜성.
이칭
이칭
김해왜성, 가락성
유적
건립 시기
1593년
관련 국가
일본
관련 인물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베시마 가츠시게
높이
5m
둘레
약 1,200m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김해죽도성(金海竹島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부산 강서구 죽림동 78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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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해 죽도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쌓은 왜성이다. 성은 녹산 방향의 바다 쪽에서 서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수로와 김해로 연결되는 육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김해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하는 오봉산에 위치한다. 왜성의 중심부인 내성과 현재 부산 신항만과 대동IC 간 도로가 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제1외성, 그리고 내성 동남쪽 제2외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방어하는 구조이다. 김해 부읍성과 김해시 주촌면 신답왜성(新畓倭城)이 죽도왜성의 지성(支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쌓은 왜성.
발굴 경위 및 결과

부산 신항 배후 도로 개설로 인한 동아대학교의 발굴 조사에서 제1외성 동편에서 모두 7개의 곽(郭)이 조사되었는데 제2·4곽에서는 굴립주 건물이, 제3곽에서는 1~1.5m 간격의 사선 방향 목책 주혈이, 제7곽을 따라 목책으로 추정되는 기둥 구멍들과 문지 시설이 조사되었다. 또한, 상평통보, 쇠낫, 도기 편, 백자 편, 기와 편 등이 출토되었다.

김해 죽도성의 성벽은 대부분 60120×4060cm 내외의 장방형의 깬돌로 쌓았다. 원래 왜성의 성벽은 면석과 면석 사이의 빈틈에 잔돌을 끼워 가며 줄눈 흐트려 쌓기 하는 것이 기본이나 죽도성의 성벽에서는 잔돌 끼움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왜성과 같이 성벽 면석의 안쪽은 잡석으로 1m 정도 뒤채움 한 뒤 흙으로 다져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죽도성에서는 서생포왜성, 웅천왜성, 순천왜성의 경우와 같이 조선 성에서 보이는 치성처럼 생긴 치상유구(雉狀遺構)가 확인된다. 치상유구 성벽의 모서리인 우각부(隅角部)는 대부분 엇갈려 쌓기 하였다. 그러나 모서리 돌의 뒷뿌리가 짧아 상하 석재의 물린 정도가 약하며, 모서리 돌 사이에 자연석의 작은 고임돌이 보이고 있어 시기적으로 일본 천정 년간(1573∼1591)에 축조된 일본식 성벽의 특징과 부합한다.

건립 경위

김해 죽도성은 1593년(선조 26) 7월경 일본 사가번(佐賀藩)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 부자(父子)가 쌓았다. 녹산 방향의 바다 쪽에서 김해로 들어오는 서낙동강변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로와 육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김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오봉산에 축조하였다. 왜성의 일반적인 입지 조건과 부합하고 있으나 강변에 위치한 강안성(江岸城)으로 지형적으로는 산성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왜성이 산성에 주곽부를 두고 평지에 보조성을 두는 형태이나 죽도왜성은 중심부인 내성과 현재 부산 신항만과 대동 IC 간 도로가 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제1외성과 내성의 동쪽 제2외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방어하는 형태이다. 죽도성의 지성(支城)은 생림면 마사왜성(馬沙倭城)과 구포왜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 측에는 인근의 주촌면 신답왜성(新畓倭城)과 김해 부읍성이 지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김해 죽도성의 축성 시기는 대부분의 왜성이 축조되는 1593년(선조 26) 5월경으로, 이후 8월에 기본적인 축성이 완료되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축조한 것으로 강화 교섭기에도 철수하지 않은 6개 왜성 중의 하나이다. 죽도성은 서부 경남 초입의 수로와 육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1597년(선조 30) 재차 침공한 정유재란 때에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죽도성을 재차 점령하여 개·보수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1598년 8월 이후 1598년 10월경 철수를 위해 왜군이 부산에 집결하기 직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폐성하였다.

형태와 특징

일제강점기에 측량한 「죽도산성(竹島山城)」이란 제목의 죽도성지 측량 도면에는 김해부의 안산인 서낙동강변의 독립된 해발 47.5m의 오봉산(五峰山) 봉우리를 중심으로 10개의 곽으로 구성된 내성이 그려져 있으며, 서쪽 구릉에 제1외성, 동쪽 구릉에 제2외성이 그려져 있다.

평면 구조는 내성과 외성 모두 중심부인 제1곽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의 구릉을 따라 곽을 덧붙여 나가는 전형적인 연곽식(連郭式) 평면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는 죽도성이 가지고 있는 지형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선조실록』에 1595년(선조 28) 2월 15일 진 유격의 접반사 이시발(李時發)이 죽도성의 규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진영의 기지는 넓이가 평양 정도나 되었으며, 3면이 강에 임해 목성(木城)으로 둘러 쌓고 토성(土城)으로 거듭 쌓은 다음 안에는 석성(石城)을 쌓았다. 또한, 높고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크고 작은 토우(土宇)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한 조각 공지도 없는 것 같았으며, 규모가 만여 명의 군사를 수용할 만하였다. 성 밑에는 수도 없이 크고 작은 선박들이 줄지어 매어 있었고 왜적에게 붙어 있는 우리 백성들은 성 바깥에 막을 치고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짓고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였다.” 또한, 죽도성의 왜장은 우리나라 말로 강강노가미(江江老加未)라 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加賀守)가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헌을 통해 본 죽도성 외곽은 목책과 그 안쪽으로 해자, 그리고 각 곽에는 석축으로 둘러져 있어 3중의 방어 시설을 갖춘 왜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죽도성에는 곽의 위치에 따라 여러 형태의 문지가 배치되었으나 타 왜성보다 내승형(內枡形) 문지(門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최외곽에 목책과 수굴(水堀)이 설치되어 있어 어느 정도 방어력을 제공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내성 내 주곽인 제1곽으로 통하는 문은 하단의 곽으로부터 위계를 따라 그보다 높은 위치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하위 곽으로 통하는 제1곽의 서쪽 외승형(外枡形) 문지가 정문으로 보인다.

죽도성에는 다른 왜성과는 달리 조선성에서 보이는 치성처럼 생긴 치상유구(雉狀遺構)가 많이 설치되었는데 주곽에 설치된 치상유구는 대부분 각로(角櫓)로 추정되며, 외곽의 것은 침공하는 적에 대하여 조선성의 치성처럼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하는 방어 시설로서 서생포왜성, 구포왜성, 웅천왜성, 순천왜성 등의 외곽에서도 확인된다.

축조 수법은 왜성의 성벽과 비슷하지만 평면 구조는 조선의 읍성이나 진성의 기본 방어 시설로 설치된 치성과 동일하다. 성벽의 모서리 돌 사이에 자연석의 작은 괨돌이 보이고 있어 시기적으로 천정 년간(1573∼1591)에 축조된 일본식 성벽의 특징과 부합한다. 한편, 죽도성에서는 내성의 서쪽 끝에 물 없는 해자인 황(隍)을 설치한 것 외에는 타 왜성에서 보이는 각종 해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기록에서와 같이 외곽 전체에 낙동강 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순천왜성에서도 내성과 외성 사이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방어에 활용하였다.

의의 및 평가

김해 죽도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기에 축조된 왜성들과 함께 일본의 성곽 발달사에 있어서 성곽 축조 수법의 큰 변화가 생기게 된 시기인 일본의 천정(天正, 1573∼1591)·문록(文祿, 1592∼1596) 년간의 축조 수법과 일치하고 있으며, 일본 근세 초창기인 쇼쿠호우기(織豊期, 1568∼1600년)에 걸쳐서 발달한 전통 석축 성곽의 기술적 특징과 외곽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江西 竹島城址』(東亞大學校博物館, 2006)

논문

城郭談話會, 「金海竹島倭城の遺構と遺物」(『倭城の硏究 』 제3호, 1999)
나동욱, 「왜성의 축조수법에 대하여」(『박물관연구논집』 12, 부산박물관, 2006)
나동욱, 「죽도왜성에 관한 고찰」(『박물관연구논집』 20, 부산박물관, 2014)
집필자
나동욱(복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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