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대는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존속했던 극장이다. 1898년(광무 2) 동대문 밖에 있던 한성전기회사 전차고 안에 설치한 ‘전기회사 활동사진소’가 전신이다. 1907년(융희 1) ‘광무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10년대 중반에는 단성사를 인수하여 영화관으로 개관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통극인 판소리와 창극·전통무용 등을 주로 상연했다. 1930년 5월 2일 한 소년이 실수하여 불을 내 전소되었다. 우리나라 극단들의 주요 공연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최초로 활동사진을 상영해 한국영화사의 효시가 되었다.
광무대(光武臺)는 원래 활동사진과 창극단의 주무대로, 당시 명칭은 ‘전기회사 활동사진소’였다. 광무대 극장건립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나와 있지 않지만, 1898년(광무 2년)에 미국인 콜브란(Collbran)과 보스트윅(Bostwick)이 동대문 밖에 있던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전차고 안에 설치한 가설무대가 그 전신이다.
1907년(융희 1) 6월부터 ‘광무대’의 칭호로 불리었다. 이곳에서 낮에는 뚝섬 놀량패(경기와 서도의 선소리패)와 소리패들이 공연하였고, 밤에는 서양의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이는 영국 · 미국 · 프랑스의 담배를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빈 담배갑을 입장료로 받았다. 당시 상연된 활동사진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광무대가 1900년대 초에 활동사진의 본거지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1908년(융희 2) 9월 6일에 박승필(朴承弼)이 전기철도회사로부터 광무대를 임대하게 되면서 광무대가 연희극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박승필은 다른 극장들이 영화와 신파극을 공연하던 것과는 달리 전통적 판소리와 창극을 보호할 목적으로 주로 판소리 · 창극 · 고전무용 등을 공연하였다. 이로써 광무대는 전통연희 전문극장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서민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박승필은 이를 걱정하여 극장을 휴관하는 기개도 보였다.
광무대는 명창 송만갑(宋萬甲) · 박기홍(朴基洪) · 이동백(李東伯) · 김창환(金昌煥) 등이 전속되어 있었으며, 중심 레퍼토리는 창극이었다. 지방순회공연을 병행하고, 시민위생을 고려한 1907년(융희 1) 위생환등회, 1912년 조산부양성을 위한 연주회 등 자선공연도 자주 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광무대는 일본와사(瓦肆) 전기회사의 소유로 귀속되었던 바, 그 회사가 사업 확장을 하면서 광무대 건물을 차고(車庫)로 사용하겠다고 요구하여 1913년 5월에 폐관되었다.
따라서 연희공간이 없어진 광무대의 신축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1913년 을지로 3가 근처에 있던 황금유원지 안의 일본인 소유 극장 연기관을 임대하여 다시 광무대라 칭하고 공연을 재개했다. 1910년대 중반에는 시대추세에 따라 활동사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단성사(團成社)를 인수하여 영화관으로 개관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는 신파극이나 신극단체에도 대관하였고, 1925년부터 1년간은 토월회(土月會)와 전용대여계약을 맺고 대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토월회가 파산하자 광무대는 연극 · 영화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대여함으로써 특성 없는 극장이 되었고, 1930년 5월 2일 한 소년의 실화(失火)에 의해 전소되었다.
일제시대에 전통극인 판소리와 창극 · 전통무용 등을 주로 상연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에 중대한 구실을 했고, 연흥사(演興社)와 더불어 원각사(圓覺社) 이후 동양극장이 설립될 때까지 오랫동안 우리나라 극단들의 주요 공연장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최초로 활동사진을 상영함으로써 한국영화사의 효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