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고종3)~1949. 본명은 이종기(李鍾琦), 아명은 동백(東白).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庇仁) 출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4년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 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에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 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 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으나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 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