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월회 ()

토월회 창립 동인들
토월회 창립 동인들
연극
단체
1923년에 조직되었던 극단.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23년에 조직되었던 극단.
개설

평범한 가운데 현대미가 있는 회명(會名)을 짓기로 하여 처음 신월회(新月會)라 붙였으나, 현실[土]을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月]을 좇는다는 뜻으로 토월회라 고쳤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정식으로 조직된 것은 1923년 5월 경, 당시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승희(朴勝喜)·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이서구(李瑞求)·박승목(朴勝木)·김을한(金乙漢)·이제창(李濟昶) 등이 시작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무대예술 지망의 박승희를 제외하고는 문학의 김기진, 의학의 박승목, 조각의 김복진, 미학의 이서구, 영문학의 김을한 등 모두가 연극과는 거리가 멀어 처음에는 예술전반에 걸친 문예서클로 시작하였다.

따라서 토월회란 명칭으로 발족한 첫 모임에서는 김복진의 자화상 조각, 박승목의 승무도안, 김기진의 단편소설, 객원이었던 김명순(金明淳)의 시, 박승희의 창작희곡 <길식 吉植> 등을 분석 비평하였다.

이렇듯 작품발표회 겸 합평회를 거듭하는 동안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회원들은 대중에 파고들만한 연극이 효과적인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유진 필롯 작 <기갈 飢渴>(전원 출연), 체호프(Chekhov,A.P.) 작 <곰>(延鶴年 주연), 쇼(Shaw,G.B.) 작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하였나>(박승희 주연), 그리고 박승희 작 <길식>(김기진 주연) 등 단막극 4편을 선정하였다.

이어 귀국한 동인들은 당시 찾기 힘들었던 여배우로 이월화(李月華)·이혜경(李惠卿)·이정수(李貞守) 등 3명을 확보하고 연습을 시작, 그 해 7월 4일에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의 막을 올렸다. 첫 공연은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의 조화가 매우 교묘하여 식자의 칭찬이 많았다.”(동아일보)는 보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리얼한 연기와 무대미술이 주목을 끌었다.

그 동안 과장되고 황당무계한 신파극만 보아오던 관중이 미숙한 리얼리즘에 가까운 그들의 진지한 연기에 공감하고 사실적 배경화와 장치·소품에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무대경험이 없는 대학생들의 졸속공연은 성공하기 어려워 빚만 지고 실패로 끝났다.

이어 박승희의 강력한 주장을 좇아 제2회 공연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무대미술에 이승만(李承萬)·원우전(元雨田)·윤상렬(尹相烈) 등을 보강하고, 연기진에는 안석주(安碩柱)·이백수(李白水)·이소연(李素然)과 신인으로 김해일(金海一)·조천성(趙天星)·최성해(崔星海) 등을 기용하였다. 당시로서는 쟁쟁한 구성원들로서 명실상부한 극단으로 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또한 레퍼터리로 대중성을 띨만한 마이어 푀르스터(Meyer-F○rster,W.) 작 <알트 하이델베르크>, 톨스토이(Tolstoi,L.N.)작 <부활>, 스트린드베리(Strindberg,J.A.) 작 <채귀 債鬼>와 제1회 때 평이 좋았던 쇼 작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하였나>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지은 <오로라> 등 4편으로 정하였다.

자금조달에서부터 번역·각색·연출·연기까지 박승희가 도맡아 하였고 장치는 김복진과 이승만이 원우전의 조력을 받는 등 만전을 기하여 일본의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보다 앞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9월 18일부터 24일까지 조선극장에서 막을 올린 제2회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창립공연의 빚을 청산함은 물론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극단이라는 성가를 얻는 데까지 이르렀다. 특히 <부활>에서 카츄사역을 맡은 이월화와 네프류도프역의 안석주가 인기를 끌었다.

토월회가 공연하여 대성황을 이룬 <부활>과 <알트 하이델베르크>는 둘 다 사랑을 테마로 한 작품들로서 예술성보다는 대중성이 더 강한 것이었으며, 이보다 앞서 일본에서도 문예협회(文藝協會)와 예술좌(藝術座)가 상연하여 그 비속성을 지적받은 바 있었다.

그 중 <부활>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1916년에 신파극단인 예성좌(藝星座)가 근대극이라 하여 공연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토월회의 제2회 공연은 대중을 깊이 의식한 공연으로서 그들의 성격과 앞날의 방향을 예시해준 것이었다.

사실 토월회의 주역 박승희가 일본에서 체험하고 배워온 것은 정통적 리얼리즘이 아니었다. 일본 근대극의 본격적 출발이라 할 쓰키지소극장(1924년 창립)이 생기기 이전에 귀국한 그가 본 것은 신파극과 신파극에서 신극(리얼리즘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예술좌 연극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토월회의 제2회 공연은 “서울에서 처음 보는 연극이요, 처음 듣는 말이었고, 토월회가 하는 것이 정말 연극이었다는 반응과 함께 젊은이의 순결한 열로 절대한 수확을 얻게 되었으며, 따라서 진부한 조선극단의 레벨을 어느 정도까지 본격적인 그것으로 이끌어놓았다.”(김연수, 극단야화, 매일신보, 1931.5.23.)는 평가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토월회의 공연활동은 대중들에게 상당히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나 전문가들의 눈에는 아마추어의 때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비쳐졌다.

그것은 주로 토월회가 무대장치에서 사실주의를 지향하여 재래 신파극을 훨씬 넘어섰으나 연기가 미숙하였으며 극예술에 전혀 경험이 없는 문학과 미술학도들의 문예서클의 한계를 쉽게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월회는 제2회 공연을 분수령으로 하여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애초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단 한번만 공연하고 그친다는 계획이었는데, 제1회 공연이 실패하여 큰 적자를 봄으로써 제2회 공연을 하게 되었고, 게다가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마저 겹쳐 회원들이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을 때 토월회의 애초 사명은 끝났다는 것이 대다수 창립회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광적인 연극애호가 박승희만은 연극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워 분열을 일으킨 결과, 김기진·김복진 등 창립회원 및 연학년은 국내에서 가입한 안석주·이승만·윤상렬 등과 같이 토월회를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창립회원들의 대거 이탈은 토월회의 해체나 별 다름없었다. 박승희는 제2회 공연 때 가입한 신진회원들을 데리고 재발족을 하게 되었다.

동경유학생들의 문예서클의 하나였던 이 회가 당시 풍미하던 학생민족운동의 한 방편인 강연회와 연예활동 중 후자를 택하여 예정하지 않았던 제2회 공연까지 하고서 진로의 고뇌를 겪을 때, 예술과 영리라는 이원(二元)의 길을 걷는 전문극단으로 전신(轉身)한 것은 아무래도 신극사의 필연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토월회는 동인제를 폐지하고 극본·연출 등 만능의 박승희를 회장으로 하여 시인 홍노작(洪露雀)이 문예부 경리에 앉고, 미술부 경리에 원우전, 경리부 경리에 정원택(鄭元澤), 출연부 경리에 이백수가 앉음으로써 명실상부 새로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 출생의 박세면(朴世冕)과 최호영(崔虎永)·홍재유(洪栽裕) 등이 음악부를 맡아서 전속 관현악오케스트라까지 조직해 전문극단으로 손색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3회 공연이며 동시에 전문극단으로 바뀐 뒤의 첫번째 공연으로 1924년 1월 22일부터 박승희 작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 홍노작 번역의 <회색의 꿈>을 상연하였다.

이 때의 특색은 러시아인의 사랑을 그린 <사랑과 죽음>에서 조택원(趙澤元)이 무용을 하고 전속 오케스트라가 막간마다 명곡을 연주한 것이었다. 이 점은 뒷날 신파극에서 음악과 막간극이 생기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처럼 토월회는 제3회 공연부터 완전히 상업성을 띠었고, 곧이어 제4회 공연으로 <부활>과 <사랑과 죽음>을 재상연하였다. 이 공연은 인기는 끌었으나 이 극단이 처음부터 레퍼터리 빈곤에 봉착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5회 공연인 톨스토이의 <산송장>의 무대는 주제가인 <카츄사의 노래>와 함께 널리 알려졌고, 자선공연으로 <오로라>와 <사랑과 죽음>을 재상연하였다.

그 뒤 6월 말부터 7월까지 창립1주년 기념공연으로 <부활>·<카르멘>·<장한몽>·<지장교(地藏敎)의 유래> 등을 연달아 무대에 올렸다. 이들은 모두가 번안극이었으며, 그 성격상 6·7회 공연부터는 개량신파극단으로 굳어져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5년에 들어서부터 토월회는 본격적인 흥행극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극단제도를 개혁, 합자회사를 만들어 자본의 기초를 굳건히 함과 동시에 전무에 이서구를 앉혔다.

그러나 그 뒤 2년 여 동안 활동하면서 부닥친 네 가지 문제인 자금난·작품난·여배우난·극장난 등은 좀처럼 해결하기 어려웠다.

결국 박승희는 유산을 정리하여 극장 광무대(光武臺)를 1년간 전속으로 계약하고 레퍼터리도 종래와는 달리 가무극을 주로 하기로 결정, 배우도 가무에 능한 쪽으로 일신시켰다.

1주년 기념공연 때의 복혜숙(卜惠淑)과 더불어 석금성(石金星)이 가입한 것도 이 때였고, 신인배우 모집을 통하여 서일성(徐一星)·이운방(李雲芳)·이진원(李晉遠)·이용구(李容九)·염유일(廉唯一)·김일(金一)·서월영(徐月影)·양백명(梁白明)·권영우(權寧愚)·박제행(朴齊行) 등이 선발되었다.

당시의 간부급 배우는 이백수·이소연·윤성묘(尹星畝) 등이었다. 광무대를 전속극장으로 정하면서 예술 반 기업 반이라는 목표 아래 월급제를 실시하였으나 일부 여배우를 제외하고는 실천되지 못하였다.

전속 광무대의 첫 공연이며 제10회 공연은 1925년 4월 박승희 작 <산서낭당>과 각색비극 <희생하든 날밤>, 기타 광무대 노래꾼들의 독창·입창(立唱)·좌창(座唱)·승무 등으로 짜여졌다.

제11회 공연으로는 <간난이 설음>과 <진세의 풍경>이 무대에 올려졌다. 당시 광무대에서는 1년 무휴로 2일마다 한번씩 공연 제목을 바꾸어야 했으므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역시 극본 준비였다.

그래서 제12회 공연은 비극 <이내 말씀 들어보시오>·<사랑과 죽음>·<명예와 시인>, 그리고 <무지한 무리> 등 모두 애정비극에다가 명창 권금주(權錦珠)의 판소리·가야금, 또 조선권번의 조선춤이 곁들여졌다.

제13회 공연은 <카츄샤>의 재상연, 제14회는 <산송장>, 제15회는 <데아보로>와 <희생하든 날밤>이 각각 재상연되었으며, 제16회는 <추풍감별곡 秋風感別曲>이 공연되었다.

6월에 들어서는 창립2주년 기념 겸 제17회 공연으로 사회극인 <여직공 정옥(貞玉)>을 비롯하여 <농속에 든 새>·<국교단절> 등을 대대적으로 공연하였다.

그러나 관객감소에다 총독부의 검열강화까지 겹쳐 <산데아보로>·<월요일>·<무지한 무리> 등이 공연중지됨으로써 극단에 더욱 타격을 주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간난이의 설움>·<온천장의 사랑>·<농속에 든 새>·<로서아딴스>·<산서낭당>·<월요일>·<국교단절> 등이 공연되었고, 9∼10월에는 <이내 말씀 들어보시오>·<산곡간의 그늘>·<쭈리아의 운명>·<부활>·<희생하든 날밤>·<장화홍련전> 등을 선보였다.

극본은 박승희가 도맡았는데, 짧은 기간이라서 연습은 엉망이었다. 그러던 차에 하나의 방편으로 당대의 인기작가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무정>·<개척자>·<재생> 등을 흥노작 각색으로 광무대에 올렸다.

이들은 인기가 꽤 있었으나 극단의 경영난을 타개할 길이 없었으므로 다시 고전작품으로 돌파구를 찾기로 결정, 그 첫 단계로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다.

당대의 명창인 김창룡(金昌龍)의 창을 곁들여 복혜숙(춘향 역)·양백명(방자 역) 등이 출연한 <춘향전>은 토월회 사상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첫 지방순회의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미 신극의 기수라는 자긍심마저 버리고 저질 통속작품으로 관객을 동원했던 토월회에 대하여 그 졸속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그러던 차에 복혜숙이 개인사정으로 극단을 떠남으로써 여배우난에 봉착하였다.

다행히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尹心悳)이 가입해서 용기를 얻자 그를 주연으로 1926년 2월 미국의 인기영화 <동쪽길>(이경손 각색)과 <놓고 나온 모자>·<밤손님>등이 잇달아 상연되었다.

곧 이어 <카르멘>·<신데아보로>·<곰> 등이 공연되었는데, <카르멘>에서는 윤심덕이 많은 노래를 불러 장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어려운 고비에서 토월회의 핵심멤버인 김을한을 비롯해 이백수·이소연·윤심덕·박제행 등 5명이 탈퇴하는 일이 생겼다. 흥행위주의 극단운영과 박승희의 지나친 독주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회원들로 계속 공연을 하였으나 이미 쇠진한 데다 탈퇴한 김을한·이백수·윤심덕·박제행 등이 주동, 초창기에 떠나갔던 김기진·김복진·연학년 등이 합세하여 백조회(白鳥會)라는 새 극단이 발족되면서 토월회는 결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2월 24일 제56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2년이 지나 박승희를 중심으로 한 전회원들이 다시 모여 재기를 다짐하게 되었다. 1928년 10월 재기공연으로는 박승희 작 <이 대감 망할 대감>·<사(死)의 승리>·<혈육>과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과 흥노작 번안의 <오남매>·<추풍감별곡> 등이었다. 그러나 토월회의 재기공연 역시 타락하였던 말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혹평을 받았다.

여기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못 올린 토월회는 그 뒤 박승희의 <요부 妖婦>·<모반(謀叛)의 혈(血)>·<교장의 딸> 등을 우미관(優美館)에서 공연했으나 구태의연함을 벗어날 수는 없었고, 재기 반년도 못 되어 다시 휴면상태로 들어갔다.

1929년 가을에 찬영회(讚映會) 주최로 두번째 재기공연을 갖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조선극장의 경영주인 안봉호(安鳳鎬)와 신용희(申鏞熙)의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한다.

그리하여 흥행을 위해 연극과 영화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 신용희의 요구대로 토월회는 조선극장과 계약을 맺었다. 박승희와 나중에 가입한 박진(朴珍)은 재기공연작품으로 <아리랑고개>(박승희 작)와 최승희(崔承喜)의 무용을 정하고 회원을 확충하여 1929년 11월초에 막을 올렸다.

일제의 식민통치로 토지를 잃고 북간도로 가는 한 실향민가족의 참담한 이야기인 <아리랑고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지수탈로 인한 민족의 궁핍상을 매우 감상적으로 묘파한 이 작품은 비록 대중적인 상업극이었지만, 당시 연극인들이 잠재적으로 애국심에 불탔고 절실한 그 시대를 연극에 진실하게 반영시켰기 때문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때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민요인 <아리랑>은 금지곡이 되었다. 그 뒤 토월회는 광무대시절과 같이 조선극장과 1년 계약을 맺고, 강홍식(姜弘植)과 전옥(田玉)을 주역진으로 새 진용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불여귀 不如歸>·<초생달>·<즐거운 인생>·<여군도 女軍島>·<목신의 작란>·<품행조사>·<희생>·<나무아미타불>·<라이스카레 통역생>·<남경(南京)의 거리>·<깊어가는 거리>·<월요일>·<엉터리 김부자> 등을 계속 상연하였다.

이 모든 작품을 순전히 박승희 한 사람의 손으로 3, 4일 만에 한편씩 레퍼터리를 바꾸어 올려야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과거 작품이 아니면 번안물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1929년 11월까지 토월회는 지방공연까지 합쳐 통산 87회의 공연을 가졌고, 총 2만 5,000여 원의 투자를 한 것으로 추계된다. 공연작품수도 무려 212편이고, 토월회를 거쳐 나간 회원수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토월회의 타락은 더욱 심해졌으며 막간 촌극(寸劇)·악극(樂劇) 등 대중연예적 요소를 가미하였고, 끝내는 다른 신파극단들처럼 지방으로 다니기로 하여 1930년 2월에 수원을 시작으로 유랑극단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토월회는 1931년 발족된 지 9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토월회를 해산시킨 박승희는 방송극협회와 극단 대장안(大長安)도 조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토월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1932년 2월에 태양극장(太陽劇場)이라는 토월회 개편극단을 발족시켰다. 레퍼터리는 박승희 작 <고향> 같은 몇몇 창작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토월회 때 작품의 재탕이었다.

초기에는 이론가 현철(玄哲)과 새로운 사람들도 여러 명 가담하여 1934년까지 중앙에서 공연활동을 벌였으나, 1936년 이후로는 주로 지방의 유랑극단으로 전국을 흘러다녔고 만주·북간도·일본까지 순회공연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의 탄압은 가중되었고, 재정난에 따른 단원들의 이탈로 인하여 1940년에는 태양극장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옛 단원들이 모여 토월회를 재건하였으나, 박승희 작 <사십년>·<의사 윤봉길>·<모반의 혈> 등만을 공연하고 다시 해산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1931년의 토월회 해산 원인에 대해 박승희는 극장 부족, 연극인 부재, 중산층 몰락에 따른 관객 부족, 사회의 연극에 대한 몰이해 등을 열거하였으나 토월회 자체가 그러한 악조건을 극복해 나갈만한 전망이나 실력이 있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물론 근대극의 전통이 없고, 또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 식민지통치 밑에서 연극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토월회 자체에 투명한 이상도 없었고 정통적 근대극을 할만한 역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처럼 각본난에 시달리면서도 발굴한 극작가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극단의 성격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비록 토월회가 저속한 신파극단만 난무하던 1920년대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처음에는 그래도 정통적인 서구근대극(사실주의연극)을 시도해보려 하였고, 연극을 하는 방식도 정석대로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저질 신파극 개선에 상당히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실적 무대장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구치다데(口建)식에다가 무대장치·의상·분장 등이 일본의 삼류 신파극을 못 벗어나던 기성연극계를 물리치고 혁신을 가져오도록 개량신파를 하였던 것도 토월회였다.

“일본신극사에서 예술좌가 쓰키지소극장 이전에 맡았던 신극운동의 선구적 구실을, 한국신극사에서 토월회가 맡았다.”(李杜鉉, 한국연극사)고 한 말은 토월회의 성격과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이광래(李光來)가 토월회의 연극을 중간극 정도로 본 것과 통하는 말이다.

따라서 박노춘(朴魯春)과 김경옥(金京鈺) 등의 토월회 사실주의론은 그 초창기 활동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서항석(徐恒錫)은 이광래의 토월회 중간극론을 낭만주의 연극사조로 확대시켰다.

특히 서항석은 초기 토월회의 활동을 ≪폐허 廢墟≫·≪영대 靈臺≫ 등 낭만성이 강한 문예동인지 활동과 연결하는 한편, 백조동인 홍노작·안석영 등이 참가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토월회의 연극을 낭만주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토월회의 한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고 학생극·중간극(개량신파극)·통속신파극으로 변화를 거듭한 토월회 전체에 대한 평가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듯 싶다.

참고문헌

『한국연극사』(이두현, 민중서관, 1973)
「한국신연극50년사략」(박노춘, 『신흥대학교논문집』, 1959)
「토월회 이야기」(박승희, 『사상계』, 1963.5.)
「토월회의 과거와 현재를 말함」(박승희, 『조선일보』, 1929.10.3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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