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하여 극협(劇協)이라고도 한다. 좌익연극이 활개를 치던 광복 직후 그들에 대항하여 민족극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정신을 이어받았다.
이 극단은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을 고문으로 하고,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園)·이화삼(李化三)·박상익(朴商翊)·김선영(金鮮英) 등으로 조직되었다.
1947년 1월 31일에 극예술원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했다가 유치진의 <조국>(2막) 공연의 성공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발전적으로 해체하면서 새로운 진용을 보강하여 극예술협회라는 명칭으로 재창립하였다.
유치진 작·연출의 <자명고>, 유치진 작, 이화삼 연출의 <마의태자>, 앤더슨 작, 유치진 연출의 <목격자>, 진우촌(秦雨村) 작, 이화삼 연출의 <왕소군 王昭君> 등을 공연했으며, 유성애(柳誠愛)·이애경(李愛景)·장일호(張一湖)·오사량(吳史良)·주경선(朱敬仙) 등의 연기자를 보강하였다.
그 뒤 이광래(李光來)의 <청춘>(유치진 연출), 유치진의 <대춘향전>, 부처 작 <포오기>, 진우촌 작 <죄> 등을 공연했다. 그러나 유치진의 작품에만 의존하여 폐쇄성을 드러내고 침체됐다는 비판을 받게 되자, 방향을 바꾸어 오영진(吳泳鎭)의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와 윤방일(尹芳一)의 <자유를 찾는 사람들> 등을 공연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1월에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국립극장의 전속극단 신극협의회(약칭 新協)로 흡수되었다. 극협은 만 3년 동안 19회의 공연을 가졌는데, 창작극 11편, 번역극 3편, 소설 각색극 1편을 공연하였다.
작가별로는 유치진이 9편으로 압도적이고, 진우촌 2편, 윤방일 1편, 오영진 1편, 정비석(鄭飛石) 1편, 이광래 1편, 미국극 2편, 중국극 2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극협이 공연한 연극들의 주제는 대체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광복 직후 연극들의 공통적인 주제였던 애국과 혼란한 사회를 비판한 풍자적인 작품들이었다. 극협은 반공의 기수로서 혼란기에 민족극의 정통을 이은 신극운동의 중심적 극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