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해량(海良). 서울 출생. 고조부 종응(宗應)은 조선 철종의 사촌이고, 할아버지 재영(載榮)은 왕실 의전실장이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 외과부장을 지낸 근용(瑾鎔)의 장남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항일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카와중학(金川中學)을 졸업하고, 중국 상해의 후장대학(滬江大學)에 다니던 중 장티푸스에 걸렸으나 극적으로 살아나 귀국하였다.
부산 집에서 요양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여 연극을 공부하였으며, 재학중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여 연기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니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국하여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후신인 극연좌(劇硏座)에 가입하였다. 말단 배우로 취직하였으나, 극연좌가 일본경찰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여 1년 여만에 실직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뒤 대중적 성격이 강한 극단 고협(高協)에 정단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시는 대학에서 연극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드물던 시대였으므로 이론을 갖춘 그는 매우 필요한 배우였다. 그러나 괜찮은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작고 목소리가 가느다란 것이 흠이 되어 각광을 받지 못하고, 주연 배우로서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연극계의 젊은 지도자로,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좌우익 연극인들이 주도권다툼을 할 때 그 당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좌익 연극에 대항하여 극단 전선(全線)뿐만 아니라 극예술협회(약칭 극협)를 조직하는 등 우익 민족진영의 선봉장에 서서 연극의 정통성을 지켰다.
그때는 유치진(柳致眞)과 같은 인물이 친일문제로 칩거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연극이론 및 극단운동, 그리고 완력으로 좌익 연극을 물리쳐야 하였다. 결국, 극단 극협은 광복 직후 민족연극운동을 정도(正道)로 들어서게 하였고, 이것이 1950년 봄 국립극장 설립과 함께 창단된 극단 신협(新協)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 국립극장 활동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으나, 전쟁중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연기생활과 함께 연출도 겸하기 시작했다. 예술원 발족과 함께 30대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59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잠시 동안 환도(還都)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단원으로 있다가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극장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연극 외적인 일, 즉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5선)과 민주공화당 창당멤버로 활약하였다.
1970년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두 번 지냈으며, 다시 연극에 복귀하여 주로 국립극단의 연출을 많이 맡았다. 1984∼1987년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 <천사여 고향을 보라>·<들오리>·<황금연못>·<뇌우> 등이 있고, 저서로는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과 ≪허상과 진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