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 ()

서울 단성사 정측면
서울 단성사 정측면
영화
단체
1907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있는 극장.
이칭
이칭
대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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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7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있는 극장.
개설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지명근(池明根) · 주수영(朱壽榮) · 박태일(朴太一) 등이 공동 출자하여 기존 목조 2층의 건물을 가지고 세웠다. 무대설비와 대도구 등의 제작은 경성좌(京城座) 일본인 무대디자이너가 맡았다.

연원 및 변천

단성사(團成社)는 처음에는 기생들의 창이나 무용 등으로 자선공연을 주로 하였다. 1908년 7월 붕괴사고와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908년 10월 문을 닫았다가 곧 다시 개관해서 각종 연희(演戱)를 공연하였다. 1909년 이익우(李益雨)가 사장으로 있었으나, 다음해인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와 함께 경영권이 일본인 후지와라 유타〔藤原雄太郎〕에게로 넘어갔다가 1911년 최우석(崔禹錫) · 장기형(張機衡) · 박기영(朴基英) 등 3인 공동경영으로 전환되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광무대(光武臺) 경영자 박승필(朴承弼)이 인수하였다. 박승필에게 넘어가기 전 주로 판소리 · 창극 등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이었고, 가끔 활동사진도 상영하였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단성사는 영화관으로 사용하였으며, 3층 벽돌건물로 개축하였다. 영화전용극장으로 바뀌고 나서도 개화기의 극장들이 연극과 영화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도 많이 공연되었다. 특히 이 곳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의리의 구토」가 개봉되어 ‘영화의 날’이 이 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1929년 극단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도 단성사에서 창립공연을 하였으며, 대체로 신파극단들이 이곳에서 연극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0년대에는 외국영화도 상영하였고, 1940년 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단성사로 환원하였다. 2001년 9월 단성사 건물이 철거되고 신축공사로 착공되어 2005년 2월 7개관을 갖춘 규모의 멀티플랙스(Multiplex) 영화관으로 개장되었다가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였다.

2008년 4월에는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부도처리되어 같은해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단성사는 광복 후 악극(樂劇)을 공연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영화관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단성사는 극장이 드물던 개화기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연극과 영화상영의 주요근거지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신극사이야기』(안종화, 진문사, 1955)
단성사(www.dansung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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