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연좌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된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으로 연출가 및 극작가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단체이다. 당시 극예술연구회의 활동을 3기로 나누어 볼 때 제1기는 1932년 5월부터 1934년 12월까지로 홍해성(洪海星)이 연출을 담당하던 시기이고, 제2기는 1935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로, 유치진(柳致眞)이 연출을 담당하던 때였다. 제3기는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된 이후 유치진·서항석(徐恒錫)이 운영해온 1938년 5월부터 극연좌가 해산된 1939년 5월까지이다.
일제는 극연에서 발행하던 기관지『극예술』을 제5호에서 정간(停刊)시켰으며, 극예술연구회의 ‘연구회’라는 명칭이 불온사상(不穩思想)의 표상이라 하여, 이를 떼고 ‘좌(座)-일본식 극단을 일컫는 표기’를 붙여 ‘극연좌’로 개칭할 것을 강요하였다. 따라서 신극수립을 목적으로 창립하여 8년간의 정기공연 17회의 기록을 갖고 1938년 3월극연좌로 개칭하였다.
극예술연구회에서 극연좌로 개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1939년 5월에 이 단체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극연좌는 1년만에 6∼7편의 공연을 올리고 해산하였다.
극연좌 개칭후 첫 공연은 김진수(金鎭壽) 작「길」이었고, 그 뒤 자넷 막스(Janet Marks) 작·이서향(李曙鄕) 역「뻐꾹새」, 맥스웰 앤더슨(Maxwell Anderson) 작·장기제(張起悌) 역「목격자」, 클리포드 오데츠(Clifford Odets) 작·서항석 역「깨어서 노래부르자」등을 공연했다.
그 뒤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 출신의 젊은 연극인 김동원(金東園)·이해랑(李海浪)·이진순(李眞淳) 등이 가담하여 극단진용을 보강, 샤를 빌드락(Charles Vildrac) 작·이헌구 역「상선(商船) 테나시티」, 톨스토이(Lev Nikloaevich Tolstoi) 작「카추샤」,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작·유치진 역「눈먼 동생」,「목격자」, 유치진 작「풍년기(豐年期)」, 「춘향전」 등을 재상연하였다. 또한 정기공연 외에도 제2회 동아일보 주최 연극경연대회에 신인 극작가 함세덕(咸世德) 작「도념(道念)」을 가지고 참가하였다.
대체로 극예술연구회의 연장적 성격이 강하여, 새로운 작품의 발굴·상연과 신인극작가의 등용 및 소장 연극인의 영입 등이 주목할 만하고, 재상연을 통한 흥행적 배려가 돋보였다. 아울러 영화부까지 두어「애련송(愛戀頌)」을 제작한 것도 운영상의 흥행적 고충의 한 단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