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성(文秀星)은 1912년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직을 사퇴한 윤백남(尹白南)이 현동철(玄東哲)과 동경유학생(東京留學生) 조일재(趙一齋)와 함께 창단한 극단이다. 윤백남과 조일재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관람하고 ‘일본 신파의 원칙 없는 흉내’라 비판하면서 본격적인 신파극을 공연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단원으로 안광익(安光翊)·이범구(李範龜)·김상순(金相淳)·한철순(韓喆淳)·차관호(車寬鎬)·나효진(羅孝鎭) 등 주로 지식층이 모여 활동하였다.
문수성은 원각사(圓覺社)에서 일본의 국민신문에 연재되어 호평을 받았던 신파극「불여귀(不如歸)」를 조일재의 번안으로 창립공연하였다. 그 뒤 일본 신파극의 번안 작품인「천리마(千里馬)」·「형설(螢雪)」·「송백절(松柏節)」등을 상연하였다.
이 극단은 대표 윤백남이 도일(渡日)과 재정문제로 한때 공연이 중단되었으나, 1914년 3월 13일 오구조(吳龜祚)·최기룡(崔起龍)의 재정지원으로「덕국토산(德國土産)」을 상연하게 되면서 재기 공연에 성공하였다. 이후 문수성은「청춘」·「비파가(琵琶歌)」·「춘풍곡(春風曲)」·「눈물」·「단장록(斷腸錄)」등을 연이어 공연하였다.「청춘」은 조일재와 이상협(李相協)의 합작·각색 작품으로 조혼(早婚)으로 인한 피해를 다룬 작품이고,「눈물」과「단장록」은 가정비극 계열의 본격적 신파극으로 이 작품들은 모두 인기를 끌었다.
1914년 6월 28일부터 대구를 비롯한 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휴극(休劇) 상태에 들어갔다가, 1916년 7월 2일부터 혁신단·예성좌(藝星座) 등과 ‘신극대합동연극(新劇對合同演劇)’ 공연을 끝으로 만 4년 만에 자체 해산하였다.
문수성을 이끈 윤백남과 조일재는 직접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신파를 폭넓게 섭렵하였고, 교육받은 문사(文士)들이 조직한 극단이라 하여 세칭 문사극(文士劇)으로 불렸으며, 윤백남은 정통극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연극을 정극(正劇)이라고 불렀다.
문수성은 혁신단 연극에 반기를 들고 정석대로 신파극을 공연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당시의 관객들은 오락성과 유희성을 더 강조한 혁신단의 공연에 더 호응하여 좋은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문수성이 남긴 업적은 지식층의 청년들이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는 것과, 일본신파극 몇 편을 새롭게 소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수성은 1910년대 초 혁신단·유일단(唯一團) 등과 함께 초창기 신파극을 주도한 극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