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천재적 재질이 있어 13세 때에는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아명(兒名)이 밤쇠였는데 어린 나이로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에 나가 성인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전라감사한테서 참봉직을 받았고, 원각사(圓覺社) 시절에는 여러 차례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고종한테서 감찰직(監察職)을 제수 받았으며, 원각사 폐쇄 뒤에는 궁내부(宮內部)의 별순검(別巡檢)의 직을 3개월 정도 수행하였다.
어느 때 서편제(西便制) 선배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소리를 듣고 뜻한 바 있어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매한 동편제(東便制)에 새로운 통속적인 소리조를 가미하여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 객지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서울에 올라와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원각사 간부로 있으면서 판소리와 창극공연에 힘을 기울였다. 1934년에 이동백(李東伯) · 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제자양성과 창극공연에 힘쓰다가 74세로 죽었다.
생전에 많은 제자를 길러 장판개(張判介) · 박중근(朴重根) · 김정문(金正文) · 박봉래(朴奉來) · 박녹주(朴綠珠) 등 쟁쟁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제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리가 많이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의 소리는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나 아니리가 부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교육과 더불어 창극공연을 많이 하였으며 이때 취입한 음반도 많이 남아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잘 하였고, 특히 <춘향가> · <심청가> · <적벽가>를 잘 하였다. 일제 때의 음반 중 <수궁가>의 ‘고고천변(皐皐天邊)’, <춘향가>의 이별가(離別歌) ‘날다려가오’, 단가(短歌) 중 ‘진국명산(鎭國名山)’ 등은 걸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