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5월 10일에 당시 여류명창 김초향(金楚香)의 발의로 서울 관훈동에 있던 김초향의 집에 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 등 판소리명창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속악인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연구회는 만들었으나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1935년 서울 익선동에 있던 당시 여류명창 박녹주(朴綠珠)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박녹주의 주선으로 전라남도 순천의 독지가 김종익(金鍾益)의 후원을 받아 그 해에 익선동에 큰 한옥을 마련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당시 참가한 명인·명창들을 보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김연수(金演洙)·정광수(丁珖秀)·김준섭(金俊燮)·김초향·박녹주·김여란(金如蘭)·임소향(林少香)·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이었고, 김재선(金在先)·정원섭(丁元燮)과 같은 명고수(名鼓手),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한주환(韓周煥)·박상근(朴相根)·신쾌동(申快童)·정남희(丁南希) 등의 산조명인, 오태석(吳太石) 등 가야금병창명인, 한성준·박소군(朴素君)과 같은 무용명인(舞踊名人), 김연승(金演承)과 같은 경서도소리명창 등이다.
많을 때에는 130여 명에 이르는 남녀명창들이 참가하였다. 총지휘는 이동백이 맡았고 창극(唱劇)의 작곡·편곡은 정정렬이, 기획과 사무는 김연승이 맡았다.
당시 이 연구회 한식건물에는 수위실로 쓰는 문간방, 사무실로 쓰는 방 등이 있었으며, 창악실(唱樂室)이 여러 개 있어서 송만갑·이동백·정정렬과 같은 명창들이 판소리를 전수하였고, 따로 기악실이 있어서 박종기·강태홍·정남희 등 산조명인들이 기악을 전수하였다.
연구회는 여러 가지 공연에 참가하였고, 1935년에는 창극단체를 조직하여 그 해 봄에 정정렬 편곡으로 창극 <춘향전>을 창립기념작품으로 서울동양극장(東洋劇場)에서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은 대구·부산·진주·광주·전주·함흥·평양·마산·충무·여수·목포·대전·청진·사리원·개성 등지의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그 해 가을에는 동양극장에서 정정렬 편극, 김용성 극본에 의하여 <심청전>이 공연되었는데 역시 크게 성공하였다. 1936년 2월에는 정남희·오태석·조상선(趙相鮮)·임방울(林芳蔚)·김연수·박녹주·박초월·김소희 등 소장파들이 주동이 되어 조선성악연구회 직속극단으로 창극좌를 조직하고 그 해 4월, 총지휘 이동백, 기획 김용구, 정정렬 편극, 김용성 각색의 <흥보전>을 동양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창극좌는 <흥보전>에 이어 <숙영낭자전>·<별주부전>·<배비장전> 등을 공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방송출연은 물론 음반취입에도 참여하여 판소리와 가야금산조·거문고산조 등의 음반제작이 이루어져 명인·명창들의 음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한때 주춤하였던 원각사(圓覺社) 이래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운영진이 소장파로 넘어가면서 의견이 분열하여 1936년 말에 해산하고 말았다.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이 연구회는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민속기악 보급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고, 이들이 남긴 이 시대의 여러 음반들은 이 분야에 대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