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출생.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소질이 있었고 목청이 좋아 판소리에 뜻을 두고 7세에 정창업(丁昌業) 문하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시작하였다.
14세 때에 정창업이 죽자 그 뒤 이날치(李捺致)로부터 배웠으나 16세 때에는 이날치도 죽어서 혼자 공부하였다. 이후 익산 신곡사(神谷寺), 충청남도 홍산 무량사(無量寺), 충청남도 공주 갑사(甲寺) 등지를 옮겨 다니며 40세 전후까지 판소리를 공부하였으며, 한때 마산에서 몇 해 동안 판소리를 지도하였다.
1926년에 50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소리선생으로 활약하였는데, 그의 명망은 대단하였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제수받았다고 전해진다 오랫동안 「춘향가」를 연마하였고, 「춘향가」를 새로 짜서 정교한 음악적 특징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발표하자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다.
1934년 송만갑(宋萬甲) · 이동백(李東伯) · 김창룡(金昌龍)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교육과 판소리 공연에 힘썼다. 특히 창극공연에 힘써 그에 의해 편극되어 무대에 올려진 1936년의 「춘향전」과 「심청전」은 획기적인 것이었고, 공연의 대성황을 이룬 작품이었다. 당시의 창극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은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목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하여 여러 번 좌절하였으나 50세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련을 하여 대명창이 된 것이다. 그의 음반으로 여러 대목이 남아 있는데 「춘향가」에 걸작이 많다.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신연맞이’이다. 그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 · 김연수(金演洙) · 이기권(李基權) · 조진영(趙進榮) 등 많은 명창이 이어받았으나, 김여란의 「춘향가」가 정정렬의 바디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