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습이란 판소리 명창들의 학습을 보여주는 큰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조선 숙종 이후 전주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타고 활쏘는 활쏘기대회의 일종이었으므로 ‘대사습(大射習)’으로 쓰기도 하였다. 그 뒤 영조 무렵 물놀이가 함께 연행(演行)되었고, 철종 무렵 여러 가지 놀이와 더불어 판소리경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연방법은 지금과 같이 심사위원에 의한 심사가 아니었고, 어느 특정인에게 명창의 칭호를 안겨 주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대중들에 의해 명창으로 불리게 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연은 전주의 전라감영과 전주부의 통인청(通引廳) 주관으로 해마다 동짓달에 전주의 다가정(多佳亭)과 같은 정자에서 열렸다.
이 두 통인청은 따로 잔치를 벌이며 판소리 명창들을 불러다 소리를 시켰는데, 서로 보다 뛰어난 명창을 불러 청중들에게 더 좋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많은 돈과 극진한 대접으로 명창들을 확보하였고, 또한 숨은 명창들을 찾는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동지 때가 되면 전국의 명창들과 젊은 판소리 학도들이 치열한 경연을 벌였고, 판소리를 즐기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판소리의 가장 큰 잔치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대사습에서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은 거의 언제나 최상의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젊은 판소리 학도들은 여기서 기량이 인정되면 판소리 명창으로 판가름이 나기 때문에 이를 등용문으로 생각하여 다투어 참여했다고 한다. 순조 때의 주덕기(朱德基), 철종 때의 박만순(朴萬順) · 정창업(丁昌業) · 김세종(金世宗), 고종 때의 유공렬(柳公烈) 등이 대사습을 통하여 배출된 대표적인 명창들이다.
이와 같은 대사습은 한말 이후 중단되었다가, 1975년 전북 지방 유지들의 힘으로 70여년 만에 부활되었다. 현재의 대사습은 해마다 단오 무렵에 거행되며,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 그런데 놀이형태는 판소리 명창을 비롯하여 농악 · 기악 · 무용 · 시조 · 민요 · 가야금병창 · 판소리일반 · 궁도의 9개 부문으로 보강된 일종의 종합적인 국악경연대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사습은 예나 지금이나 해마다 많은 명인과 명창들을 탄생시켜 우리의 민속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판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