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청단’이라는 명칭의 어원은 가면의 색상에서 왔을 듯하나 분명하지는 않으며, ≪동국세시기≫의 12월조에 보이는 나희(儺戱)의 청단(靑壇)과 어음상(語音上)의 연관도 연상된다. 나희는 세모의 세시풍속으로 가면극을 수반하는 굿판이고, 또 청단은 ‘靑丹’ · ‘靑壇’ 어느 쪽으로도 한자화 할 수 있으니, 양자의 연관을 연상할 수 있으나 고증하기는 어렵다.
청단놀음은 주로 초여름이나 팔월 한가위 때 한천(漢川) 백사장에서 장막을 둘러치고 노는데, 음력 정월 보름께에 놀기도 한다. 대사(臺詞)나 사설이 전혀 없는 가면묵극(假面默劇)으로 모든 내용이 춤으로써 표현된다. 이 극은 언제부터 놀아왔는지 알 수가 없으나 1935년의 놀음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1981년 이래 다시 복원되어 전승되고 있다.
읍내에 전하는 유래담에 의하면, 옛날 전라도의 어느 부호가 잃어버린 부인을 찾기 위하여 탈을 만들고 춤이 능한 자를 모아서 놀이판을 벌이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이름하여 ‘청단’이라 하였다. 마침내 예천읍 동본동(東本洞)에서 놀이를 베풀었을 때 많은 관중들 속에서 부인을 찾아내었다. 부호는 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부터 어찌된 일인지 예천읍에서는 자주 화재가 일어나서 두통거리가 되었다. 읍내의 원로들이 모여 그 원인을 규명한 결과 ‘청단’의 영향임을 알아내고 청장년을 모아 재연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읍내에서는 씻은 듯이 불이 나지 않고, 따라서 세세연년(世世年年 : 해마다) 이 놀음을 놀아왔다고 한다. 예천읍은 예로부터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각종 산물이 집산하던 상업의 중심지로 장날마다 상인과 한량들이 흥청거리던 고을이다.
청단놀음에 사용되는 탈이나 의상은 모두 한량들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농악도 그들이 직접 치며, 광대도 역시 그들이 담당하였다. 농악은 외마치장단 · 세마치장단 및 살풀이장단 뿐이고, 춤은 덧뵈기가 중심이다. 박으로 만든 탈이 19개, 키〔箕〕로 만든 탈이 4개이며, 무동(舞童)역을 하는 어린이 외에 광대의 총수가 25명, 농악 악기는 꽹과리 · 장구 · 징 · 북 · 호적 · 소고 등이다.
전체 여덟 마당으로 짜여져 있는데, 과거에는 갹출되는 경비에 따라 한두 마당의 가감이 있었다. 첫째마당은 광대놀음으로, 광대 2명이 북을 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농악 가락에 맞추어 흥겹게 논다. 둘째 마당은 주지놀음으로, 2명의 주지광대가 저마다 주지판을 들고 서로 부채질을 하고 또 관중 앞으로 다가가서 부채질을 하면서 춤을 춘다.
셋째 마당은 행의놀음으로, 양반과 사대부가 즐겁게 춤을 추며 노는데 기생인 쪽박광대가 나타나서 양반과 사대부를 번갈아 가며 유혹한다. 넷째 마당은 학춤〔鶴舞〕으로, 학이 나와 춤을 추면 박쥐와 제비가 차례로 나와서 함께 어울려 춤을 춘다. 다섯째 마당은 지연광대놀음으로, 키로 만든 커다란 탈을 쓴 4명의 지연광대가 긴 수염을 휘날리며 춤을 춘다.
여섯째 마당은 파계승놀음으로, 쪽박광대가 마당을 쓸고 있을 때 탁발승이 지나다가 이를 목격하고 쪽박광대의 유혹에 빠져 놀아나는데 초랭이가 나와 호통을 친다. 일곱째 마당은 바라춤으로, 여승 2명이 고깔을 쓰고 바라를 들고 춤을 춘다.
여덟째 마당은 무동으로, 이동무 4조와 삼동무 2조가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 민속극은 그 전설로 보아 시장에서 벌이는 놀이마당인 듯하나, 우리 나라 전래의 도시가면극과 농촌가면극 중 어느 계통인지 분명하지 않은 특징을 가진, 주로 탈춤으로 표현되는 묵극(默劇 : 몸짓극)이다.
사대부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내용 등은 다른 지방의 영향을 입은 듯하다. 담당자가 지방의 한량들이며 노는 시기가 세시풍속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장소도 냇가라는 점 등은 지금까지의 민속극 연구에 또 다른 과제가 될 수 있는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