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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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개념
고려시대 재담과 익살 등으로 이끌어가던 즉흥극. 우희 · 창우희.
이칭
이칭
우희(優戱), 창우희
목차
정의
고려시대 재담과 익살 등으로 이끌어가던 즉흥극. 우희 · 창우희.
내용

당시 우희(優戱) · 배우희(俳優戱) 또는 창우희(倡優戱)로 불리던 놀이는 재담을 주로 한 조희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나라 문헌에는 ≪고려사≫와 고려의 기타 문헌에 꽤 일찍부터 조희에 관한 기록들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에 의하면 조희는 우리 나라의 화극적 전통(話劇的傳統)의 출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에서 그 예를 들어보면, 1110년(예종 5)에 하공진(河拱辰)놀이의 기록이 보인다.

하공진은 거란 침입시에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변절을 거부하다 살해된 공신인데, 배우가 있어 이 선대공신의 이야기를 놀이로서 기렸다고 한다. 이때 배우가 말을 주된 표현수단으로 하는 조희로써 공연하였음을 확신하게 한다.

≪고려사≫ 열전에는 공민왕 때에 배우가 거리에서 세도가 심하였던 염흥방(廉興邦)의 종들이 백성에게서 조세를 수탈하는 모양을 연출한 우희를 놀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조희가 시류의 악폐나 권세가의 횡포를 풍자하는 사회성을 띠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조희는 이 같은 독연형태는 물론 여러 등장인물들에 의하여 놀아졌는데, 그 기록으로는 1165년(의종 19) 4월에 좌우번의 내시들이 주1을 설치하고 경연으로 잡기를 연출한 내용이 보인다.

즉, 이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보여주는 공물바치기놀이이다. 이 때의 관리들은 모두 고관 · 귀족들의 자제와 선비들로서 직업적인 배우들은 아니나 그 당시 또는 그 이전부터 전래한 배우들의 놀이를 모방한 것으로 생각되며, 몸짓과 더불어 재담도 섞인 놀이였으리라 생각된다.

이 놀이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소학지희(笑謔之戱)의 화극적 전개로 계승이 되었고, 조선 후기의 산대도감계통극의 대사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단행본

『한국연극사』(이두현, 학연사, 1985)
주석
주1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 무대. 신라 진흥왕 때 시작한 팔관회에서부터 설치된 기록이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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