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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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작품
조선시대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 즉 우희(優戱)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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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 즉 우희(優戱)의 하나.
내용

조선시대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의 하나. 『연산군일기』 11년(1505) 12월 29일조 기록에 보인다. 고려의 조희(調戱:재담·익살 등으로 이끌어가던 일종의 즉흥극) 이래로 직업배우에 의한 여러 가지 소학지희가 『조선왕조실록』과 『어우야담(於于野譚)』·『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의 문헌에 나타나는데 노유희, 즉 늙은 선비놀이가 그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공길(孔吉)이라는 배우가 있어 임금 앞에서 이 놀이를 놀며 말하기를, “전하를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친다면 저는 고요(皐陶)와 같은 신하인데, 요순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요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논어』를 외워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워야 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설사 쌀이 있은들 제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임금은 그 말이 불경스럽다고 하여 공길을 매질하고 유배시켰다고 한다. 이 노유희가 지속적으로 전승해온 놀이였는지, 아니면 공길이라는 배우에 의한 즉흥적인 것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호사설』에 “지금 등과한 자들이 창우(倡優)를 시켜 놀이를 하니, 창우들의 놀이에 유희가 있다. 다 떨어진 의관을 한 선비가 온갖 추태를 연출하여 축하연의 즐거움으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승된 놀이일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직업배우들은 삼일유가(三日遊街)에도 고용되어 노유희를 하였고, 설날 같은 명절에 상경하여 궁궐에서 선비의 생활을 풍자하는 놀이를 하였다.

노유희와 같은 독연(獨演) 형태의 놀이는 그 뒤 다수의 등장인물에 의하여 사회비판이나 시사풍자의 내용을 담은 연희로 성장하였다. 당시의 직업배우들은 설날과 같은 유사시에만 상경하여 궁궐에 출입하여 위와 같은 놀이를 하였고, 평소에는 떼를 지어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사회적 모순을 보고 들었을 것이며, 그와 같은 견문을 토대로 노유희가 무세포(巫稅布)놀이와 같은 연희를 산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회풍자놀이는 고려시대 조희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소학지희의 화극적(話劇的)인 전개를 통하여 조선 후기의 산대도감계통극의 형성에 맥이 닿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전통연희사』(전경욱, 학고재, 2020)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한국연극사』(이두현, 학연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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