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기를 다루는 재주이다. 고대부터 활을 쏘고 말을 달리고 무술을 하는 무사를 양성하였다. 이는 기사도·무인도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이후 칼을 쓰고 창을 사용하는 무예가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훈련원 등에서 무예를 훈련시키고 무관 선발 시험도 치렀다. 임진왜란 이후에야 장창, 곤봉 등 6가지 무기를 쓰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이십사반무예를 정비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신식 총포의 위력에 눌려 무예의 기능은 상실하였다.
무예는 활 · 칼 · 창 · 총포 등을 이용하여 전투에서 적과 겨루는 행동이다. 고대부터 우리 나라는 신시(神市) 이래로 특별한 구역에 소도(蘇塗)를 세우고 국책으로서 무사들을 양성하였다.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따르면 소도의 경기에서 선비를 뽑아 학문과 검술 · 궁술 · 기마 · 택견 · 앙감질 · 헤엄 등의 기예를 닦고, 산천을 두루 여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시월제(十月祭)와 같은 고대 제천행사에서 무예경기가 열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소도가 선 곳에는 충 · 효 · 신 · 용 · 인의 오상지도(五常之道)가 있었으며, 소도의 옆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우고 미혼 자제들에게 독서와 습사(習射) · 치마(馳馬) · 예절 · 가악(歌樂) · 권박(拳博) · 검술(劍術) 등의 6예를 강습하게 하였다.
이처럼 활을 쏘고 말을 달리고 무술과 검술을 하는 것은 고대의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교육과목으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무예는 고구려 고분인 삼실총 · 쌍영총 · 무용총 · 각저총 등의 벽화에 나타나 있는 기사도(騎射圖) · 수렵도(狩獵圖) · 무인도(武人圖) · 개마도(鎧馬圖) · 기전도(騎戰圖) · 택견 · 씨름 등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씨름 · 택견 · 궁술 등으로 분류되지 않은 종합무예였으며, 살상과 놀이 및 무용 등의 요소를 고루 갖춘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반 총포와 화약의 사용으로 무예종목들의 효용성이 떨어져 민속놀이로 변형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우리의 무예비법이 실전되고 중국의 무예와 권법이 널리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활이나 칼 등의 무기를 이용한 무예는 개인적인 수련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군대조직에서도 군사적인 효과가 높았다.
국가정책에 따른 각 시대별 무예의 실태를 보면, 고려 1384년(우왕 10)에 중낭장 곽해룡(郭海龍)이 건의하여 무예도감을 설치하고 무예로 무인을 선발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1392년(태조 1) 훈련관(訓鍊觀)을 설치하였고, 1467년(세조 13) 훈련원(訓鍊院)으로 개칭하여 군사에게 무예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까지의 무예로서는 궁사(弓射)에 속하는 몇 종류에 불과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무예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 보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그 기법을 물어서, 장창(長槍) · 당파(鏜鈀) · 낭선(狼筅) · 쌍수도(雙手刀) · 등패(藤牌) · 곤봉(棍棒)의 여섯 가지 무기를 쓰는 기술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장창은 길이 1장 5척의 나무자루 끝에 창날을 물린 긴 창으로 보졸이 사용한다. 당파는 끝이 세 갈래로 되어 있는 7척 6촌의 삼지창이다. 낭선은 1장 5척 길이의 창으로서 대나무자루 앞쪽에 날카롭게 날을 세운 9∼11층의 가지가 붙어 있다. 쌍수도는 5척 칼날에 자루길이가 1척 5촌이 되는 칼을 양손으로 쥐고 사용한다. 등패는 등나무 줄기로 만든 둥근 방패와 요도(腰刀) · 표창(鏢槍)을 가지고 화살과 돌을 막으며 돌진하여 적을 공격한다.
곤봉은 길이가 7척이 되는 단단하고 둥근 나무 끝에 칼날을 붙인 무기이다. 1594년(선조 27) 2월에 창설한 훈련도감에서는 이 무예6기를 군사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궁술에 숙달한 무관들은 창검을 사용하는 새로운 무예를 기피하였다.
병조(兵曹)에서는 “우리 나라 풍속이 오로지 활쏘기만 익혀왔으므로 창검을 사용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갑자기 치고 찌르는 재주를 익히게 하여도 실정에 맞지 않아서 효과가 없습니다. 지금 이들 무관에게 이미 이룬 재주를 버리고 이루기 어려운 새기술을 익히게 하니, 활을 잡고 화살을 쏘게 할 경우 모두 명중시킬 수 있는 무사이지만, 칼을 잡고 머뭇거리게 될 경우 오히려 쓸모없는 둔한 군졸이 될 것입니다.” 하고 아뢴 데 대하여, 선조는 일을 그르치지 말고 더욱 힘써 훈련시키라고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효종 때는 임금이 친히 군사훈련을 자주 검열하고 장려해서 무예가 많이 숙련되기에 이르렀고, 1749년(영조 35)에 와서 죽장창(竹長槍) · 기창(旗槍) · 예도(銳刀) · 왜검(倭劍) · 교전(交戰) · 제독검(提督劍) · 본국검(本國劍) · 쌍검(雙劍) · 월도(月刀) · 협도(挾刀) · 권법(拳法) · 편곤(鞭棍)의 12기(技)를 더하여 앞서 배운 6기와 합한 십팔기무예(十八技武藝)로써 군사를 훈련하였다.
1790년(정조 14) 『무예도보통지』를 이룩함에 있어서, 말을 타고 행하는 무예인 기창(騎槍) · 마상쌍검(馬上雙劍) · 마상월도(馬上月刀) · 마상편곤(馬上鞭棍) 4기와 격구(擊毬) · 마상재(馬上才) 2기를 더 보태어 이십사반무예(二十四般武藝)로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이후 칼을 쓰고 창을 사용하는 격자지법(擊刺之法) 무예가 본격적으로 행하여지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후 조총(鳥銃)을 쏘는 군사를 양성하여 포수(砲手)라 하고, 활을 쏘는 궁병(弓兵)을 사수(射手), 창검병(槍劍兵)을 살수(殺手)라 하여 이들 군사를 통틀어 삼수(三手)라고 불렀다.
국가에서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시험에는 이십사반무예로서 기창 · 격구 · 마상월도는 장교와 기병에 한하여 응시하게 하였으며, 보병에게는 쌍검 · 제독검 · 월도 · 왜검 · 교전 · 본국검 · 예도 · 장창 · 기창 · 당파 · 낭선 · 등패 · 권법 · 편곤 · 협도 · 곤봉 · 죽장창이 관무재초시(觀武才初試)의 과목이었다. 이 밖에 고대의 부여 · 고구려 때부터 행하여왔던 무예인 활쏘기에 속하는 목전(木箭) · 철전(鐵箭) · 편전(片箭) · 기사(騎射) · 유엽전(柳葉箭) · 기추(騎芻) 등의 종목이 들어 있고, 포수와 무예포수 선발에는 조총 3발을 사격하는 시험을 과하였다.
목전 · 철전 · 편전 · 유엽전 등은 화살의 종류로서 목적물에 따라서 각기 용도가 달랐다. 이십사반무예로써 관무재초시 과목의 제식을 보면, 쌍검은 보졸이 양손에 요도를 하나씩 가지고 행하는 검술이고, 제독검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군사가 전하였다는 검법으로서 보졸이 요도를 사용하는 14자세가 있다. 월도는 칼날이 초승달 모양인 긴 칼을 가지고 보졸이 사용하였으며 32자세가 있다.
왜검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하던 검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토유류(土由流) 30자세, 운광류(運光流) 25자세, 천류류(千柳流) 38자세, 유피류(柳彼流) 18자세가 있다. 이 왜검으로 적과 상대하는 교전 25자세가 따로 있다. 본국검은 신라 때 황창(黃倡)의 검술로 전하는 독특한 검법의 32자세이다. 예도는 칼날의 길이가 3척 3촌, 자루길이가 1척의 끝이 뾰족한 단도로서 27자세가 있다.
기창은 노란색이나 빨간색의 작은 기를 달았으며 짧은 창으로서 의장병이 사용하는 무기이다. 협도는 자루의 길이 7척, 칼날 3척, 무게 4근의 큰 칼을 가지고 보졸이 행하는 검술이며, 죽장창은 길이 20척에 날카로운 창날이 달린 대나무로 만든 긴 창이다. 편곤은 길이 8척 9촌의 곤봉 위쪽에 쇠고리를 붙이고, 여기에 길이가 2척 2촌 5푼이고 두께는 곤봉과 같은 쇠막대기를 연결한 도리깨 같은 무기이다.
권법은 맨손으로 행하는 격투 기술로서, 무예의 입문으로 행하는 32자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예가 실제전투에는 실용되지 못하였고, 다만 군사훈련이나 무과시험과목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하였으나 서구의 선진문명이 밀려오면서 신식 총포의 위력에 눌려 무예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무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면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택견 · 궁술 등의 무예뿐만 아니라 오늘날 탈춤 · 살풀이 등의 각종 무용동작들이 기(氣)를 모았다가 푸는 무예의 동작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한, 요즈음에 와서 전통무예의 재현을 통하여 선조들의 기상과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