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통전(通典)』 등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인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서는 소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國邑)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浮屠)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삼국지』위서 한전에 실린 기사의 내용은 소략하지만 신앙이나 의례 및 삼한시대의 정치·사회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일찍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많이 행해졌다.
우선 일련의 민속학적 연구가 있다. 소도는 제의가 행해지는 신성 지역이며 별읍이 바로 성역이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읍락의 원시 경계표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소도는 신단(神壇)의 의미인 ‘수두’나 높은 지대의 의미인 ‘솟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역으로서의 소도는 대마도(對馬島) 등에 일부 전하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현존 민속에서는 전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신간(神竿)으로 해석하였다.
소도란 ‘솟대’·‘솔대’·‘소줏대’ 등에서 온 말로, 여기의 ‘소’는 ‘길게 또는 곧게 뻗은’이라는 의미이고, 대는 ‘간(竿)’이므로, 소도는 입간(立竿)이라 한다. 혹은 소도는 고간(高竿)의 몽고어 발음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소도는 현재 우리 민족의 민속에 나타나는 세 종류의 장간(長竿)을 의미하는데, 첫째는 개인의 가정에서 경사나 기도를 드릴 때에 임시로 세우는 신간이요, 둘째는 마을의 동구에 건립하는 ‘솟대’·‘거릿대’·‘수살목(木)’ 등이고, 셋째는 등과자(登科者)가 자기 문전이나 산소 또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화주(華柱)이다.
또한 이러한 의미의 소도는 만주의 신간이나 몽고의 오보(鄂博), 인도의 찰주(刹柱)나 인타라주(因陀羅柱)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곧 소도는 종교적인 일정한 성역이며, 그 안에 긴 장대를 세웠고 그것을 중심으로 제의가 행해졌다.
한편, 소도의 의례는 천군이 주재한 것으로 정설화되어 있지만, 소연맹국 안의 별읍이 소도여서 그 곳에서는 지신(地神)이나 토템 신(totem神) 등 귀신이 숭배되었고,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은 국읍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역사학적 연구에서 소도는, 특히 도망자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소도가 청동기시대적 산물이라면 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들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도는 성읍국가 이전 단계인 군장사회(君長社會)에서 천군이 임무를 수행한 장소이며, 신전과 같은 위엄을 가지면서 당시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사장으로서의 천군은 통치자와는 별도로 농경 의식과 종교 의례를 주관하였다. 그 뒤 천군에서 왕으로 사회가 발전하면서 종교적 입장의 소도는 정치적 중심지로 그 위치가 변하여 갔다.
한편 별읍이 바로 소도였다는 점을 중시하여, 소도는 소연맹국시대(小聯盟國時代)에 행해진 제의였던 것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소연맹국의 지배자가 정치적 실권을 가지자 그 안에 들어온 다른 읍락이나 소국은 별읍을 이루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독립된 제의를 주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소도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나오지 않고 한전(韓傳)에만 나오기 때문에 삼한사회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성읍국가나 각 읍락이 받드는 시조 신앙이 소도 신앙으로 되면서, 국읍의 천신과 별읍의 지신으로 각각 신앙되다가, 연맹왕국이 확립되면서 천신과 여러 부족의 지신을 함께 묶어 제의를 행하는 제천 의례로 바뀌어간 것이라고 본다면 소도 신앙은 연맹왕국이 확립되기 이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한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