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권1 고조선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세개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시는 그 뒤 환웅이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고, 단군이 평양을 도읍지로 하여 고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고조선 종족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시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신시는 신정시대에 도읍 주위에 있던 별읍(別邑)으로서 삼한의 소도와 성격이 같은 신읍이었다는 해석과, 둘째 신시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으로서 환웅을 가리키며, 그것은 조선 고대의 국가들에서 왕을 뜻하는 ‘신지(臣智)’가 존칭화한 것이라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