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三手)는 조선 후기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총칭이다. 포수는 총병(銃兵), 사수는 궁병(弓兵), 살수는 창검병(槍劍兵)을 지칭한다. 임진왜란으로 오위제(五衛制)의 취약성이 드러나자 새로운 체제를 갖춘 군사조직으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소부대 단위로 정예화하여 좌영과 우영으로 나누고, 삼수연기지법(三手鍊技之法)에 따라 총을 전쟁 수단으로 하는 포수와 살수 위주로 조직하였다. 유생·한량·서얼·승려 등 다양한 신분으로 구성되었고, 삼수병의 급료를 해결하기 삼수미를 거두어 들였다.
조선 전기 군사 제도의 근간(根幹)을 이루었던 오위제(五衛制)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그 취약성이 드러남에 따라 새로운 군사조직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쟁의 황폐로 인한 기민(飢民)이 속출하자 이들의 구제도 또 다른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체제를 갖춘 군사조직의 아문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훈련도감이다. 여기에 소속된 삼수병의 양성은 훈련도감이 설치된 뒤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양성을 위한 선구적인 조처가 있었다.
1593년(선조 26) 평양 ·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를 고비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에 먼저 조경(趙儆) 등에게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진(陣)에 가서 화포 지식을 얻게 하였다. 그리고 행재소(行在所)에 있는 무신 · 금군(禁軍) · 화포장(火砲匠) 등을 선발해서, 각종 화포 및 방패 · 전차 · 창검 등도 익히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1593년 8월 선조가 도감(都監)을 특별히 설치할 것을 비망기(備忘記)로 전하고, 곧이어 「훈련도감사목(訓鍊都監事目)」을 발표한 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취할 것을 명하였다. 그 뒤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절강병법(浙江兵法)에 따라 정병을 양성한다는 목적하에 병사를 모집해 훈련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도감낭청(都監郎廳) 이자해(李自海)에게 『기효신서』의 내용을 해독하게 하고, 김문성(金文盛) 등에게는 모집된 병사의 훈련을 위임시켰다.
도감의 군대 양성은 『기효신서』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소부대 단위의 정예화에 두었다. 그리고 유성룡의 건의에 따른 『기효신서』를 모방, 처음에는 도감의 편제를 좌영 · 우영으로 나누었다. 좌영은 포수 위주로 하고, 우영은 기사(騎射)의 훈련을 전담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포수를 양성하기 위한 편제일 뿐 완전한 군영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도감의 조직체계가 마련된 것은 1594년 이후이지만, 이것이 정비, 발족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도감이 성립된 지 8개월 만인 1594년 4월 처음으로 연습이 있었는데, 이 때 상을 받은 자들을 중심으로 그 편제를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편제를 볼 때 몇 초(哨)가 동원되었는지, 또 도감의 전체 구성원이 얼마인 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또한, 위의 편제에서 사수의 연병(鍊兵)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포수 · 사수 · 살수로 획연(劃然)히 갈려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삼수연기지법(三手鍊技之法)에 따라 삼수병이 완전히 조직된 것은 그 2개월 뒤인 6월 이후로 생각된다. 처음 포수 중심으로 설치된 훈련도감은 그 뒤 의용대(義勇隊)를 살수로 편입하고, 다시 수문장(守門將) 등의 궁사(弓射)를 배우는 자들을 사수로 편성하였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수는 기존 관념인 궁시 중심의 규범에서 탈피하지 않음으로써 군인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구비조건이기 때문에 훈련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삼수병이라 하더라도 도감의 편제는 포수 · 총이 전쟁 수단의 주가 된 포수 · 살수를 위주로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시 전쟁 수단의 주가 되었던 궁시 중심의 사수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에서 주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힘을 근간으로 하는 궁시 위주의 전쟁이 기(技)를 근간으로 하는 포수 · 살수 위주의 전술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살수기(殺手技)는 창 · 검술은 물론, 낭선(筤筅) · 등패(藤牌) · 권법(拳法) 등 지극히 다양하였다. 삼수병의 편제는 점차 정비, 확대되어 1606년 전과 같이 사(司)→초(哨)→대(隊)→오(伍)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확대되어 2사에서 5사로 늘어났고, 1사는 3초에서 5초로 증가 편성되어 있었다.
삼수병의 수는 유사당상(有司堂上) 이덕형(李德馨)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000명 내외였던 것 같다. 그 뒤 1809년(순조 9)에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포수는 2,440명, 살수는 73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수병의 신분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유생 · 한량 · 서얼 · 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대다수는 양인과 노비였다. 한편, 기민 구제라는 목적도 가져, 훈련도감은 여기에 소속된 삼수병들의 급료해결책으로 삼수미를 거두어들여 이의 해결방편으로 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