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기 ()

조선시대사
개념
조선시대, 왕명을 내릴 때 사용된 문서 유형의 하나.
내용 요약

비망기(備忘記)는 왕명을 간략하게 하달할 때 사용된 문서 유형의 하나이다. 조선 중종 대부터 적극 활용되었으며, 대체로 승전색(承傳色)에서 맡아 작성하였는데 간혹 액정서(掖庭署) 소속 사알(司謁)이 작성하기도 했다. 작성된 비망기는 승정원(承政院)을 거쳐 해당 관서에 전달되었다. 비망기로 내리는 왕명의 내용은 다양하며, 중요한 정치적 국면 때에 비망기를 내려 국왕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 주기도 했다. 비밀 비망기는 밀봉하여 내려졌는데, 외교 관련 극비 사항을 지시하거나 선위(禪位)와 같은 왕위 교체 관련 내용을 전할 때 활용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왕명을 내릴 때 사용된 문서 유형의 하나.
변천 사항

조선시대에 비망기(備忘記)가 언제부터 사용된 방식인지는 분명치 않다. 1529년(중종 24)에 “비망기가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없던 것이나, 근래 이를 통해 답하는 경우가 많다.”라는 실록 기사가 있어 아마 중종 대 무렵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듯하다. 당시 중종은 “무릇 상소(上疏)차자(箚子)에 답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답할 때 말로 하면 듣고 간 자가 말을 전할 때 빠뜨리는 폐단이 없지 않다. 그래서 잊지 않게 하려고 종이에 써서 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국왕의 답변이 충실하게 하달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었던 것인데, 정식 문서 형태로 정리할 때 빠뜨리지 않기 위해 일단 핵심 내용을 적어서 내린 간략한 문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무렵 공론정치(公論政治)가 활발해지면서 국왕이 대간의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비망기를 활용하였다.

정조 대에는 비망기의 하달 과정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였는데, 사알(司謁)승정원(承政院)에 비망기를 전달하면 승지는 비망기를 옮겨 적은 뒤에 이를 사알과 함께 대조하는 과정을 거쳐 원본은 도로 국왕에게 돌려보내도록 정식화하였다. 즉 국왕→승전색(또는 사알)→승정원→해당 관서의 체계로 운영된 것이다.

운영 사항

비망기는 왕명을 전달하는 문서 유형으로 국왕이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시부(內侍府)에 소속되어 왕명을 전달하던 승전색(承傳色)에서 맡아 작성하였고, 간혹 액정서(掖庭署) 소속 사알이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작성된 비망기는 승정원을 거쳐서 해당 관서에 하달되었고, 이따금 승정원이 아닌 비변사(備邊司), 의금부(義禁府) 등의 특정 관서를 명시해서 전달하기도 했다. 비망기에 담긴 왕명이 그대로 국왕의 주3로 만들어 내려질 때도 있었다.

비망기의 첫머리는 대개 “전왈(傳曰)”로 시작하며, 그 왕명은 왕실, 인사, 외교, 군사, 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있었다. 간혹 정치적으로 긴급한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 비망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일례로 1680년(숙종 6)에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포도대장 신여철(申汝哲)을 불러 놓고 비망기로 유혁연의 총융사(摠戎使) 직임을 해임한 대신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총융사에 주11하였다. 당시 비망기는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활용되었는데, 주4, 윤음(綸音), 비답(批答), 주5 등의 각종 문서보다 왕명을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듯하다.

한편, 비망기 내용에 대한 반발로 일부 문구가 삭제되는 사례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경우 내용 중 일부를 주9거나 수정했던 것이다. 1722년(경종 2) 경종은 노론(老論) 측의 이이명(李頤命), 김창집(金昌集)주10라는 명을 내렸다가 소론 측 대신인 조태구(趙泰耈), 최석항(崔錫恒) 등의 의견을 수용해서 감형하여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비망기로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론 측 언관들이 비망기를 그대로 둘 수 없다며, 비망기를 갖고 들어와 감형에 관련된 문구의 삭제를 청하여 받아들여졌고, 얼마 후 이이명, 김창집 등은 사사되었다.

일부는 비밀 비망기(秘密備忘記)로 밀봉하여 내려지기도 했다. 훗날에 내용이 파악된 일부 사례를 보면, 비밀 비망기는 대외적으로 외교 관련 극비 사항을 지시하거나 주8와 같은 왕위 교체 관련 내용을 전하면서 활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비망기는 조선시대 다양한 왕명 전달을 위한 문서 유형 중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왕명의 유형에는 교문, 윤음, 비답, 판부 등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이 중 교문이나 윤음은 국가의 주16 제도라는 틀 속에서 작성되었기에 절제된 언어로 작성되어 국왕의 세밀한 심정까지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비답은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간결하고 신중해야 하였다. 판부는 정형성을 갖고 있기에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에 유효한 수단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비망기는 왕명을 전달할 때 국왕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중종실록(中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논문

명경일 「정조대 전교축(傳敎軸)을 통해 본 『승정원일기』의 문서 등록(謄錄) 체계」(『고문서연구』 44, 한국고문허학회, 2014)
이강욱, 「『승정원일기』 입시 기사와 대화 내용의 문서화」(『고문서연구』 57, 한국고문서학회, 2020)
이근호, 「조선시대 국왕의 備忘記 연구」(『고문서연구』 44, 한국고문서학회, 2014)
주석
주3

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명서(王命書). 우리말샘

주4

임금이 내리던 글. 우리말샘

주5

임금에게 말씀을 아뢴 안(案)을 임금이 허가하던 일. 우리말샘

주8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우리말샘

주9

문건 따위를 점검할 때 ‘효(爻)’자 모양의 기호를 그려서 글을 지워 버리다. 우리말샘

주10

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다. 우리말샘

주11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우리말샘

주12

임금이 내리던 글. 우리말샘

주13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우리말샘

주14

임금에게 아뢰는 글에 임금이 말미에 적는 가부의 대답. 우리말샘

주15

임금에게 말씀을 아뢴 안(案)을 임금이 허가하던 일. 우리말샘

주16

문필(文筆)에 관한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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