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때 처음으로 언급된 사알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가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초 이래로 기능·직질(職秩)이 사알과 비슷한 내알자(內謁者 : 종8품, 1인)가 액정원(掖庭院)·액정국(掖庭局)·내알사(內謁司)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이 내알자가 개칭되면서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알은 내시부에 소속된 정7품, 정원 1인의 관직이었고, 우왕 때에 내시부의 혁파로 폐지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내시부의 복구와 함께 복설되었다.
조선의 사알은 개국과 함께 고려의 사알이 계승된 것이었으나, 고려와는 달리 내시부가 환관직(宦官職)의 내시부와 내수직(內豎職)의 액정서로 분립될 때에 액정서 소속이 되었고, 또 직질이 정6품으로 상승되면서 액정서의 최고위관직이 되었다. 잡직의 체아직(遞兒職)으로서 정원은 1인이었고, 정6품 이상의 관계로는 승급되지 못하였다.
사알은 국왕에의 시종과 알현을 담당하였으며, 이러한 직임에서 국왕신주의 종묘봉안, 선왕시호의 고묘, 국왕의 사직제 등 의식시에는 집사관(執事官)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면서 후대로 계승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