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은 유연하고 율동적인 동작인 ‘품밟기’라는 우리 고유의 독창적 보법(步法)을 중심으로 상대를 발로 차거나 넘기는 기술을 사용하는 전통무예이다. 택견은 품밝기, 즉 유연하게 굼실거리는 보법(步法)을 기본으로 손과 발을 통해 상대를 차거나 던지기는 기술을 구사한다. 특징적인 것은 태권도의 직선적 발차기와 달리 부드럽고 곡선을 그리는 동작으로 힘을 내는 발차기와 씨름과 유사한 독특한 넘기기 기술을 동시에 구사한다. 또한 택견은 국내외 타 무예와 달리 자연스러운 손발 근육의 움직임 속에서의 부드러운 곡선의 몸놀림으로 상대의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독창성을 지녔다. 이에 가장 한국적 움직임으로 역사성과 고유성을 인정받아 우리 무예로는 처음으로 1983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제76호로 등록되었고 이후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신체 문화로 공인되었다.
택견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시기는 18세기 초반이다. 택견과 유사 용어인 ‘탁견’이 등장하는데 영조 4년(1728)에 김민순(金敏淳)에 의해 저술된 『청구영언 』에서의 사설시조에서 처음 보이게 된다. 이후 정조 22년(1798)에 이만영이 편찬한 『재물보(才物譜)』와 최영년이 1921년에 저술한 『해동죽지(海東竹枝)』에도 탁견(托肩)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우리 문헌뿐만 아니라 1895년에 스튜어트 쿨린이 저술한 『코리언 게임스』에도 ‘HTAIK-KYEN-HA_KI(택견하기)’ 기록이 등장한다.
앞서 문헌에서의 제시한 택견의 특징을 분석하면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마주 보고 발다리를 중심으로 서서 차서 거꾸러뜨린다는 기술 특성을 보인다.’라고 했으며 『재물보(才物譜)』에서는 각력(角力), 시박(厮撲), 졸교(捽挍)와 유사한 기술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선 씨름과 같이 상대를 넘기는 기술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택견이 ‘남에게 보복을 하거나 남의 여자를 빼앗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일이 있어 법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에 일부 서민들의 오락이나 세시풍속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우리 고유의 몸짓의 특성을 갖춘 맨손무예의 상징적 의미를 보였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1900년대 초반 자료를 살펴보면 택견이 지금의 서울(한양)을 중심으로 기술 및 경기 특성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1919년에 간행된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 에서는 ‘청년들이 택견이라 하는 것을 행함에 윗대패와 아랫대패가 있었다.’다고 밝히고 있다. 윗대는 보통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 있는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며, 지금의 사직동과 필운동 지역을 말하며 아랫대는 보통 청계천 부근 마을 뜻하며 지금의 왕십리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윗대와 아랫대 지역을 중심으로 패를 나누어 개인 연승제 형태로 택견 겨루기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송덕기는 1912년 경복궁 방향의 윗대와 청계천과 남산 부근 아랫대의 택견꾼이 겨루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아울러 당시 윗대패, 아랫대패라는 것은 택견 특정 유파라기보다는 어느 지역과 겨루느냐에 따라 위대, 아래대로 상대적으로 나누어 부른 것이라 증언하고 있다.
택견의 융성기는 영조시대이후 조선 말기까지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는 1927년에 간행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택견이 ‘조선 철종(哲宗) 말년부터 고종(高宗) 초기까지 단오날에 마을 사람들이 공터에 모여 판을 벌였고 대단히 성행하다가 쇠퇴’하였다고는데서 확인되고 있다. 아마도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문화가 사라지는 와중에 택견도 자연 소외된 것으로 보인다. 택견 쇠퇴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으나 체계적인 전수 체계가 없었던 환경적 한계와 함께 일본이 한민족 식민지화 일환으로 자국의 근대화된 무도(武道)인 검도(劍道), 유도(柔道) 종목을 우리 학교체육 교과목으로 공식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1937년에 간행된 신문자료에 의하면 택견의 자취가 사라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이후로는 음성화되어 전승된 것으로 판단된다.
택견은 1960년대에 들어 송덕기(宋德基, 1893년생)를 중심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분위기가 일었으며 이후 1970년대 신한승(辛漢承, 1928년생)에 의해 문화유산적 무예로 가치를 보이게 된다. 송덕기는 인왕산 일대 사직동 중심 윗대를 중심으로 13세부터 택견을 배우기 시작하여 1911년 사직공원 뒤 감투바위에서 임호(林虎)로부터 본격적으로 택견을 전수받고 20세에는 마을대항 택견경기에 참가한다. 한편, 신한승은 10대에 아랫대인 왕십리 신재영(辛在榮)에게서 택견을 접하고 이후 1970년에 본격적으로 송덕기에게 택견 기술을 사사받는다. 이후로 왕십리 살곶이다리 이경천(李敬天)과 구리개 김홍식(金弘植)과 추가로 재차로 전수 받아 택견기술 체계를 정립해 간다.
송덕기에게 배운 수련자는 신한승 외에 1958년에 박철희, 1961년에 김병수, 1971년 임창수, 1982년에 도기현, 1983년에 김진영, 신제민, 이준서 등이 있다. 신한승은 1973년부터 충주에서 정경화, 박만엽과 함께 이후 김정환, 성연만, 양민하 등의 후계자를 배출하였다. 추가적으로 이용복은 1984년에 신한승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이후 송덕기의 조언을 통해 독자적으로 택견을 정립하였고 최근에는 고용우가 1969년에 송덕기에게 수련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택견은 신한승과 민속 및 체육학계의 지속적 노력으로 1983년 6월 1일 택견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고, 송덕기, 신한승이 택견기능보유자로 지정되고 뒤이어 1996년 정경화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2011년에 택견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현재 택견 단체는 국가유산청이 주관하는 택견보존회와 한국택견협회와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대한택견회가 있으며 그 외에 법인형태로 결련택견협회 등이 존재한다.
택견이 18세기 조선 영조시대가 아닌 이전부터 전승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으며 이른바 수박(手搏) 및 타권(打拳)과의 연관성에서 확인된다. 먼저, 택견이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는 수박과의 관련성을 제시한 공식 자료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제102호』이며 이후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제146호』에서 위의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는 내용의 상고를 통해 재논의 된다.
이에 대한 관련 근거는 조선시대 『재물보(才物譜)』에서 “수박(手搏)은 변(卞) 이라 하고 각력은 무(武)라고 하는데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이는 다양한 맨손 기술들을 수박이나 탁견이라 칭했을 가능성에서 보면 타당한 견해로 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수박이 택견의 시원으로 삼는 것은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수박과 택견 표기에서 동질성을 확인할 수 없으며, 고려시대 중기인 무인정권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약 300년간 기록된 수박은 조선후기에 나타난 택견과 시대적 거리감이 있다는 난점을 지녔다. 다만 조선시대 문헌에서 수박과 택견의 상관성을 언급한 정황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다양한 수박의 유파가 있었고 일부 기술적 특성이 택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택견이 1593년에 등장한 타권(打拳)이라는 명칭과 관련될 수 있다는 논리도 있다. 즉, 민간에 의해 한자로의 표기 보다는 구전에 의해 음가만 전승되어 타권(thakw∧n)이 탁견(thakkj∧n)으로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타권이라는 명칭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군사적 무예의 의미로 2회 등장하는데 이러한 조선군에서 활용된 맨손무예 용어가 민간으로 퍼져나갔고 자연적으로 타권에 대한 음가가 탁견으로 전이되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조정에서 민간에서 어린아이들이 조선후기 맨손무예를 배워 놀이로 삼으면 뒷날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아이들에게 전습시킬 것을 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퍼져나갔다면 나름의 의미를 보일 수 있다.
택견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해동죽지(海東竹枝)』, 『재물보(才物譜)』, 『청구영언(靑丘永言)』에서 최초 "탁견"으로 사용된다. 탁견은 "托肩"이라고 한자를 빌려 음독하여 쓴 것으로 보이며 추가적으로 각희(脚戱), 각술(脚術), 각축(脚蹴)과 같은 한자어로도 표기된다. 하지만 1900년대 이후로는 ‘택견’과 ‘태껸’으로 기록되고 있다. 1920년에 간행된 『조선어사전』에는 ‘택견’이라고 1933년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택견"을 "태껸"으로 표기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27년에 간행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택기연(擇其緣)’과 1935년 리선유의 『오가젼집 박타령』에서 "착견"으로도 기술되기도 하였다.
고전적 방식의 택견은 패를 나누어 개인 연승제 형태로 겨루기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장은 마당에 섶을 깐 위에 멍석을 펴고 그 위에서 실시했다고 한다. 택견을 수련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 혼자 익히기는 기본동작으로서 품밟기, 활개짓, 발질, 손질 등을 상대방 없이 익히는 것이다. 둘째, 마주 메기기는 둘이 마주서서 약속 하에 마주 차고 마주 걸고 하며 익히는 것이다. 셋째, 견주기는 대련의 의미로 서로 맞서서 겨루는 것이다.
전통적인 수련 체계의 기본은 품밟기, 손기술(손질), 발기술(발질)로 크게 구분되며 발질은 차기와 딴죽(태기질)로 세분화된다. 택견의 유사 용어에서 기술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각술(脚術)에서 볼 때 발기술이 존재함을 알 수 있고 졸교(捽交)의 한 부류라 하는 기록으로 보아 씨름이나 유도와 같이 넘기는 기술을 포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택견의 기술은 1973년 문화재 당국(현, 국가유산청)에 의하여 조사된 송덕기로부터 채집한 불과 11가지였다.
그러나 1982년 제2차 조사보고서에는 기본기술 30여 종에 응용기술 100여 가지로 대폭 늘어났다. 이러한 과정은 기존 송덕기의 기술을 신한승이 추가로 정리하면서 기술을 세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덕기와 신한승을 중심으로 택견 기술 수행은 외형상의 변형과 함께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어 각기 단체마다 나름의 기술 체계를 분화 발전시키고 있다.
① 품밟기: 우리 고유의 춤과 같은 3박자 리듬으로 ‘품(品)’자와 같이 세 지점을 밟는다는 의미다. 품밟기는 발을 교대로 앞으로 내딛거나 뒤로 물리면서 삼각형 혹은 역삼각형을 이루며 기본적으로 발바닥을 붙이고 체중을 아래 위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동작을 말한다. 신한승에 의해 품내밟기, 품길게밟기, 품째밟기 등으로 정리되었다.
② 발질: 발질은 차기와 딴죽(태기질)으로 구분된다. 차기로는 발등으로 정면 위로 차던지, 발등으로 곁을 휘어차거나 발바닥으로 가슴이나 배를 질러서 차거나 발등으로 상대방 허벅지를 밖으로 차낸다던지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회전시켜 차기 등이 있다. 차기는 원칙적으로 직접적으로 상대를 가격하기 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차는 형식으로 상대를 다치지 않게끔 배려하는데 중점을 둔다.
발따귀와 곁차기는 무릎을 접으면서의 힘으로 차는 것이 특징이다. 내지르기는 상대 얼굴을 밀어 차는 형태이다. 곧은발질은 밀어 차는 형태로 발을 바로 들어올려 앞으로 차는 방법으로 발 앞축이나 뒷꿈치로 신체 중심(명치 복부정면 등)을 향해 뻗어 차는 기술이다. 는질러차기는 발이 상대 가격부위 앞에 멈춰 밀착했다가 다시 가속해 밀어내는 방식이다. 복장지르기는 복장에 발을 대고 밀거나 차는 발차기다. 돌려차기에는 후려차기(두름치기)가 있다. 이 기술은 발등을 중심으로 차는 기술이다. 솟구치기(두발낭상)는 허벅지가 가슴에 닿을 정도로 최대한 점프한 상태에서 발차기를 구사하는 기술이다. 날차기(날치기)는 한팔로 땅을 짚으면서 양다리를 올려차면서 상대의 머리를 후려치는 기술을 말한다.
딴죽(태기질)의 경우는 목덜미를 잡아 상대의 몸의 중심을 무너뜨리면서 발등으로 상대방 발뒤축을 안으로 걸어 당겨 넘기는 안짱걸이, 발바닥으로 상대방 안쪽 복사뼈를 쳐서 넘기는 안우걸이(회목치기), 발등으로 상대방 발뒤축 바깥쪽을 걸어 당겨 넘기는 낚시걸이, 발뒤축으로 상대방 오금을 당겨 넘기는 오금걸이나 오금을 지그시 밟아 제압하는 오금밝기 등이 있다.
③ 손질: 손질은 주로 상대를 잡거나 밀거나 하여 상대의 중심을 흔들면서 걸어 넘겨 넘기는 형태로 주로 발질 중 딴죽(태기질)과 함께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택견의 손질은 경기를 위한 수단으로 발기술의 보조수단이며, 싸움수를 강조하는 택견단체에서는 타격기의 손질로 보고 있다. 손질은 손을 피거나 주먹을 쥐고 하는 방법이 있다. 종류는 웃아귀로 상대방 목을 미는 동작의 칼잽이, 상대방 뒷덜미를 손모서리로 내려치는 항정치기, 손모서리로 상대방 목 동맥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도끼질, 먹을 뒤집어 아랫배를 쥐어박는 느진배지르기, 주먹으로 명치를 내지르는 명치기, 주먹으로 겨드랑이, 또는 옆구리를 치는 재갈넣기, 손가락으로 눈찌르기와 같은 안경씌우기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칼잽이 잡아대기, 이마재기 이외에 ‘옛법’ 또는 ‘살수(殺手)’라고 부르기도 하는 경우에 사용할 수 없는 위험한 기술이다. 경기에서는 움켜잡는 대신 덜미걸이, 덜미잽이 등을 사용할 수 있고 손목으로 목이나 가슴을 밀쳐내는 가로밀기가 주로 쓰인다.
④ 활개짓: 품밝기와 같은 기본 보법과 함께 경기 중에 팔을 흔들어 상대방을 혼란하게 하거나 몸의 균형과 함께 상대방 공격에 대비하거나 역공 전략으로 활용되는 일종의 추임새다.
⑤ 기합: 택견은 기술을 활용할 때 ‘이크(익크)’라는 소리를 강하게 발성한다. 이를 시행하는 이유는 기술의 힘을 배가시키도록 하는 일종의 보조적 수단으로 본다.
2011년의 택견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는 우리의 무예가 다른 국가 무예보다 상대적으로 문화유산적 가치로 인증되었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당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5가지 등재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으며 택견은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목록에 오르기 위해서는 집단 내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된 무형 유산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야 하며 해당 유산이 지속적으로 수련되어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유산 등재를 통해 유산의 가시성과 함께 그 중요성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높아야 한다.
다음으로 유산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보호 조치에 제반여건을 구비해야 하며 아울러 등재 신청 과정에서 해당 집단이 대가성 없이 관련 정보를 제공받아 등재에 동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유산이 신청국의 관련 단체와 개인의 요청에 따라 국내 국가무형유산 목록에 올라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 무예인 쿵푸는 5가지 요건 중 일부를 충족시키지 못해 자진 철회되었다. 이외에 일본 무예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없어 택견의 국제문화유산 등재는 한국의 신체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