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

상주고등학교 운동회
상주고등학교 운동회
체육
개념
인간의 신체적 활동을 통하여 근육을 단련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완성된 인격을 만들려는 교육. 신체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인간의 신체적 활동을 통하여 근육을 단련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완성된 인격을 만들려는 교육. 신체운동.
개설

흔히 체육·스포츠·레크리에이션·건강 등의 용어들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스포츠협회(sports association)를 ‘체육회’라 부른다든지 동창회의 축구 및 배구시합을 ‘동창회 체육대회’라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물론 스포츠나 건강, 축구·배구 같은 운동경기는 체육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고 체육의 수단으로서 그 범주에 속할 수는 있지만, 체육 자체가 스포츠나 건강 등과 같은 것은 아니다.

외국의 경우 ‘health, physical education, and recreation’이라는 말로써 따로따로 표현되는 것을 우리말에서는 모두 ‘체육’으로 부르는 데서 개념의 혼동이 생긴다. 이에 체육의 정의와 다른 비슷한 용어간의 개념을 정리하여 본다.

체육이란 그 용어에 나타나 있듯이 교육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이 지적·도덕적·신체적 발달을 통한 인격의 완성에 있으므로, 체육의 목적 또한 인격의 완성이며 동시에 그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체육이란 개인적·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신체활동의 잠재적 가치를 최대한 발휘시킴으로써 참된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체육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브라우넬(Brownell)과 헤그먼(Hagman)은 “인간의 성장·발달과 행위에 있어서 모든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여 선택하고 수행하는 신체활동에 의한 교육의 한 방법”이라 정의하였다. 윌리엄즈(Williams)는 “종목으로서 선택되고 결과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신체활동의 총화”라고 하였다.

닉슨(Nixon)과 코젠스(Cozens)는 “교육의 전 과정 속에서 활발한 근육활동 및 그와 관련된 모든 반응에 관한 것이며, 반응에 따른 개인적 결과에 관계되는 모든 교육과정”이라 하였다. 또 매클로이(McCloy)는 “모든 교육제도의 한 분야이며 효과적인 장소에서 지도되는 활동”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체육이란 단순한 육체적 활동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신체활동의 잠재적 가치를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줌으로써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체육은 인간의 신체적 활동, 그 중에서도 대근활동(大筋活動)을 통한 신체의 교육인 동시에, 이 신체적 활동을 수단으로 하여 이상적인 인간상, 즉 사회가 요구하는 지(知)·정(情)·의(意) 및 신체 각 측면의 조화를 통한 완성된 인격을 가진 인간을 만들려는 교육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와 체육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애매하게 사용되어 자주 혼동되고 있는 용어 중 한 가지는 ‘체육’과 ‘스포츠’의 개념이다. 이들 두 용어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구별하여 둘 필요가 있다. 스포츠는 ‘운동경기’를 뜻하는 것이며, 이를 더욱 엄밀히 말한다면 ‘경쟁이 따르는 운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서 자신과의 경쟁이 따르는 사이클링·하이킹·캠핑·반더포겔과 같은 여가선용 활동이나 야외활동도 야외 스포츠(outing sports)라 하여 스포츠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포츠’라는 용어가 ‘체육’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이를테면 스포츠협회라고 표기하여야 할 것이 체육회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즉, 대한체육회가 영어로 ‘Korea Amature Sports Association(약칭 KASA)’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전한 스포츠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를 체육회라고 부르고 있다. 체육부를 ‘Ministry of Sports’로 표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들은 무의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스포츠와 체육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전국체육대회나 학교체육대회·소년체육대회 또는 일반 사회단체에 있어 많이 사용되고 있는 ‘체육대회’라는 명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회는 여러 가지 운동종목의 경기를 행하는 것이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스포츠의 종합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육대회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스포츠는 체육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공헌도가 크며 그 수단으로서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스포츠가 곧 체육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포츠에 교육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가 인간생활을 충족시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만큼 스포츠 그 자체도 교육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스포츠에는 운동 실천적인 측면과 사회·문화적 측면이 있는데, 전자는 개인과 개인 또는 집단과 집단이 일정한 규칙 아래서 그 기능을 겨루는 것으로 경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후자는 스포츠맨쉽(sportsmanship)이라든지 스포츠가 대중 관객에게 주는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말한다.

따라서 체육과 스포츠의 개념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레크리에이션과 체육

레크리에이션이란 간단하게 ‘여가의 선용(good using of leisure time)’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대생활에 있어서 노동의 기계화, 작업의 분업화 등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여가시간은 더욱 더 증대하고 있다. 이 시간이 증대하면 할수록 그 이용방법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이 만약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을 때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즉, 여가가 남용되거나 악용되면 개인적·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레크리에이션은 이와 같은 사태를 방지하여, 개인의 행복을 증대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여가를 선용함을 뜻하는 것이다. 레크리에이션의 종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신체운동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으며, 이를 신체적 레크리에이션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가의 사용은 개인의 태도와 기능, 그리고 신체적 능력에 따라 스포츠가 되기도 하고 레크리에이션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여가시간에 어떤 스포츠활동을 하려고 할 때, 만약 그 스포츠에 대한 기능수준이 무리와 함께 즐기며 함께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면 그 스포츠를 레크리에이션으로서 행하고 싶어도 욕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스포츠에 의한 레크리에이션은 실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용의(用意)와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용의와 준비를 하는 것을 레크리에이션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이 경우 특히 신체적 레크리에이션을 목표로 하여 교육이 실시된다면 이를 신체적 레크리에이션교육이라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한편, 체육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측면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경우의 생활은 주로 운동을 행함으로써 한층 충실하게 할 수 있음을 기대하고, 그 생활의 내용으로서 스포츠 등의 신체활동을 계획적으로 행하게 한다.

그리하여 만약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 여가에 스포츠를 하고 싶을 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정도로 계획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분야가 있다.

일정한 운동기능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등 각 시기의 학습능력에 따라 분습적(分習的: 부분적으로 익힘) 또는 전습적(全習的: 전체적으로 익힘)으로 학습시키며 지도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일정한 스포츠 사회로 내보내게 된다. 이것은 레크리에이션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동시에 체육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체적 레크리에이션이라도 그것이 곧 체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보건과 체육

보건은 인간의 건강을 유지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체육도 바람직한 인간형성을 목적으로 운동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왔다. 이 경우 신체활동의 교육적 가능성은 신체활동 자체의 특성에 의하여 좌우된다.

만약 그러한 특성을 적절히 사용하여 인간의 건강 유지 및 향상을 위한 지식·기능·태도 등을 길러서 실제로 학습자를 건강하게 함으로써 보건 또는 건강교육이 목표하는 바와 같은 것을 실현하였다 하면, 그것이 체육이라는 것에는 전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체육이 신체의 건전한 발달은 물론 도덕성의 함양에도 목표를 두고 있는 것과 다른 바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체육에는 그와 같은 사명이나 임무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보건 또는 건강교육의 분야에 있어서도 심신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신체활동을 이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스포츠교육과 체육, 또는 레크리에이션교육과 체육이 서로 중복된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체육의 기원

체육의 기원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체육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풀이하고 체육의 범위를 어디까지 두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대체육에서의 목적처럼 완전한 인간형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양성을 위하여 신체활동을 시작한 때부터를 기원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 그 결과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였던 바람직한 인간양성을 위한 신체활동의 시대부터 논술하고자 한다.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고찰한다면 원시인들의 신체활동은 음식물 획득과 종족 보존 등의 본능적인 충동에서 출발된 것이며, 신앙 역시 생명을 위협하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초에는 도구가 발달되지 못하여 달리기[走]·던지기[投]·뜀뛰기[跳]·치기[擊] 등의 동작이 중시되었으나, 도구의 개발 후에는 신체활동과 더불어 도구의 제작과 사용을 위한 기술과 그 교육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체육활동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돌을 사용하다가 그 뒤 활을 사용하게 되면서 종래의 동작과는 다른 기능적 훈련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평소에 활을 사용하는 조직적·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고, 어망 등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동노작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사냥에 의존하던 생활형태가 농경생활로 정착되어 동맹(東盟)·영고(迎鼓)·무천(舞天)·10월제(十月祭) 등 제천행사를 갖게 되면서 각종 무예나 힘을 겨루는 신체활동이 공식화되었다.

이에 따라 평소에도 체계적 교육이 이루어졌으니, 체육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원초적 단계를 벗어나 생활체육이라 부를 만큼 체육의 뜻에 접근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제천행사를 개최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체활동 그 자체가 본능단계를 벗어나 의도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

시대구분

체육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체육사를 시대적으로 크게 양분한다면 1894년 갑오개혁을 중심으로 그 이전을 전통체육의 시대, 그 이후를 근대체육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통체육의 시대를 무예체육시대, 근대체육의 시대를 학교체육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체육의 목표나 방법을 중심으로 볼 때 전통체육시대는 근대적 교육활동이 시작된 이후와는 특질상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전통시대의 체육은 궁사(弓射)·검술·창술·격봉(擊棒)·기사(騎射)·격구(擊毬)·수박(手搏)·원기(猿騎:馬上才)·석전(石戰)·수희(水戱)·수렵(狩獵)·검무(劍舞) 등 대부분 무예를 중심으로 하는 유희·오락 등이 행하여졌다. 근대의 체육은 구미·일본 등으로부터 소개된 교육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체조·유희·스포츠·교련 등을 내용으로 행하여졌다.

따라서 무사(武士)의 체육에서 서민 본위의 체육으로 변천된 것이다. 무예체육에서 서민체육으로 변천하였다는 것은 무예적인 교육요소가 모두 없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체육에서 중요시 하던 신체강건·예의·용감·인내 등의 덕성과 문무겸전의 사상은 전해 내려왔으나, 근대체육시대 신체활동의 수단은 전통적인 무예·유희·오락 등이 거의 무시되고 서양 및 일본에서 도입된 새로운 축구·농구·권투·유도 등 각종 스포츠와 육상경기·체조·교련 등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일제하를 지나면서 한민족의 얼이 담긴 무예나 유희·민속놀이 등을 의도적으로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나라 체육의 특질은 체육의 수단으로 행하여지는 신체활동의 내용들은 서양의 스포츠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사상적인 측면이나 체육에 대한 관념은 동양의 지·덕·체 삼육사상(三育思想)에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체육의 시대구분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원시시대에는 생활 자체에 병행하여 체육활동이 행하여졌으므로 생활체육시대, 부족국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체육이 국방 및 자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무예수련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으므로 무예체육시대, 그리고 갑오개혁을 전후하여 근대식 학교가 생기면서부터는 체육을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교육하였기 때문에 학교체육시대를 근대체육시대라 칭하였다.

이를 또한 삼분법에 의하여 구분해 보면 고대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중세는 고려시대, 근세는 조선시대부터이나 실질적으로 고대 중기 및 근세 초기까지 무예체육의 시대였기 때문에 특징적으로 갑오개혁을 중심으로 구분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또 왕조에 따라 구분하여 보면 원시씨족시대, 부족시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왕조별로 시대적인 배경 및 체육생활의 내용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원시부족사회의 체육

원시사회에 있어서는 어떤 종족이나 부족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생활을 위한 하천·해안에서의 어로, 동식물의 채취나 포획기술과 부족간의 전투를 목적으로 한 무술연마의 무예체육으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원시인의 생활은 단순하여 의식주의 영위와 종족의 번식 이외에는 자기 종족을 외부로부터 보호, 방위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여기에서 자연히 자기들의 생활을 개척하기 위하여 무술을 연마하고 대적(對敵)의 방도를 튼튼히 하는 농병일치의 자연발생적인 개병제도(皆兵制度: 백성 모두를 병사로 양성한 제도)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무술을 습득하는 병사적 훈련에 몰두한 나머지 사술(射術)과 검술 등이 발달하고, 활과 화살은 무기나 수렵도구로도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람들이 무예훈련을 통한 운동능력 배양과 더불어 생활기구 또는 무기제작을 위한 노농과정을 통하여서도 체력을 함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미개사회에서 점차 국가가 형성, 확대됨에 따라 자연히 병제(兵制)·무예 또는 전법(戰法)이 새로운 양상으로 향상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무예의 바탕이 되는 강한 정신력과 체력의 배양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에 각종 무예를 중심으로 한 무사의 체육이 행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무예의 발달은 자연히 무사의 확고한 각종 수련과 백절불굴의 신체적인 훈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체육의 목표는 부족 방위의 무사적(武事的)인 목표, 즉 국방력과 투쟁능력 양성에서 대부분 배태(胚胎)된 것이라 하겠다. 부족이 증대되고 각 지역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부족사회가 성립되었고, 부족사회가 성립되면서 상호간의 물질약탈을 위한 전쟁이나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이 수시로 벌어지게 되었으며, 각 부족간에는 자위상(自衛上) 무기의 소유가 필요하였고 무술의 습득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각 부족사회에서는 개개인과 가가호호에 창·검·갑옷 등의 무기를 소유하게 하였고, 일단 유사시에 대비하여 부족장을 통사(統師)로 부족개병의 체제와 전술로써 일치단결하여 전투에 임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또 사회나 개인의 생활안정책으로 무술이 절대 필요하였으며 중요시된 것이다.

이 시대는 상호간의 정복이며 자기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연합과 전쟁이 쉴새 없이 교착되었다. 그리하여 약소 부족은 강대한 부족에게 정복, 흡수되었으며, 차차 부족사회로부터 왕국이 형성, 발전되었다. 국가가 확대될수록 그 투쟁의 규모도 커졌으니, 이것은 귀족층의 영토욕(領土欲)·인민욕(人民欲) 및 외민족(外民族)에 대한 공방상 자연히 징병제와 아울러 무사와 무술이 절대 필요하였던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밑에 무사교육이 시행되었음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따라서 온 국민은 모두 무사가 되어 항상 무예를 익히고 헌신적 충성을 다하여서 국민생활을 옹호하여 왔기 때문에, 무사의 체육은 단련적이고 전장(戰場)의 훈련이기도 하여 의도적으로 성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각 부족간의 투쟁을 통하여 무사의 무술이 실천적 발전을 가져왔고, 그와 수반하여 무사정신의 강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원시부족사회는 어렵(漁獵)·채취생활 및 농경을 위주로 한 생활이었고, 더욱이 원시의 농경은 풍우설한(風雨雪寒)의 자연계 현상에 절대적인 지배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농경이 위주인 원시인은 자연계의 변화현상을 신의 조화작용으로 보거나 악귀·지신(地神)들의 작란(作亂)이나 발광으로 보았다.

때문에 일(日)·월(月)·성신(星辰) 등의 천체(天體)와 고산(高山)·큰 강·해안들을 모두 신으로 알거나 또는 신의 처소로 믿는 제천경신(祭天敬神)의 자연신앙이 인간을 지배하며 생활의 기본을 이루었다.

농경사회에 있어서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즐거움을 가지는 시기는 춘계와 추계이므로 유희·오락은 물론 제천대회인 영고·무천·동맹 등도 이 두 계절에 행하여지고 있었다. 이때는 주야로 각 부족사회에서 주식(酒食)을 베풀고 가무(歌舞)를 마음껏 즐겼다. 오늘날의 농악과 같은 것은 제천대회에서 유래한 전형적인 민속가무의 유희운동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러한 농악을 비롯하여 여흥으로 온갖 유희·오락을 즐기던 것이 점차 경쟁의식을 갖게 되어 특정한 종류의 경기로 화한 것으로, 오늘날의 경기는 유희 등에서 비롯되었다. 유희·오락은 각종 무기가 지니는 특수한 기능·성격에 따라 그 기술을 키우기 위하여 행해졌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예컨대, 활쏘기 기술을 숙달시키기 위하여 어떤 표적을 정하여 개인적 또는 단체적으로 행하는 연습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우나 원시사회에 벌써 각저(角觝)·수박(手搏) 등의 무예적 유희나 운동이 행하여졌으리라고도 추측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투쟁의 형식으로나 또는 유희·운동의 형식으로서도 맞잡고 힘을 겨루는 일은 때때로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또 상대와 싸우는 경우 서로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적인 인간의 행동이나 무술의 수련에 있어서는 그 기술이 경쟁의식을 초래하는 것이니, 자연 일정한 경쟁규칙의 정형에 따라 유희·오락의 경기규칙이 생겨 경기화되는 것은 유희·오락의 자연적 발달현상이라 할 것이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체육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이 서로 쟁탈전을 벌인 시대였으므로 무술이나 무예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대내적으로는 민족적 대통일의 위대한 시련기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외적에 대한 민족적 의식의 각성을 촉진시킨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은 무인정신의 조성을 촉진시켰고, 마침내 고구려의 조의선도(皁衣仙道), 신라의 화랑도와 같은 동서고금에 빛나는 무인정신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성립하고 또 성장하였으므로 군사력이 가장 많이 필요하였다.

이에 고구려의 지배층은 스스로 무장하여 하나의 군사적 사회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산(大山)·심곡(深谷)이 많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좋은 전답이 적고 식량이 모자라 힘써 농업을 영위하더라도 배를 채울 수 없는 상태에 있어, 평상시에도 다른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전투적인 훈련에 전력하였다.

백제는 한강유역 일대를 지배하는 부족연맹체로 성립된 나라로서, 삼한(三韓)의 문화에다 북방의 유·이민을 흡수하여 성장하였으므로 비교적 일찍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주로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와 고구려의 것을 흡수하였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자체 문화를 잘 보존하지는 못하였으나 백제문화는 거의가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문화, 즉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육성시켰다.

신라는 소백산맥에 막혀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삼국 중 가장 늦었으나, 민족적 전통의 유대가 강력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대륙문화 수용태세는 후진적이었으나, 문화수용 이후는 이를 잘 섭취, 발전시켜 독창적인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문화의 토대를 이룩하였다.

고구려는 국민개병제도를 택하여 무술의 훈련과 향상에 힘쓰며, 기마전투의 훈련을 평소에 장려하여 수렵으로 무사의 군사적 훈련을 실시하고 국왕 친림하에 대규모 수렵경기대회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무술과 담력을 수련하는 동시에 소박하고 용감한 인간성과 정신생활을 추구하였다.

백제도 고구려보다는 다소 뒤지나 숭무정신(崇武精神)을 지니고, 특히 정련된 기마전술의 무술을 중요시하였다. 신라의 숭무정신은 특정한 무사들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이 기풍을 배양함과 아울러 교육면에서도 무사교육이 시행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요청, 국민적 지지, 사회적 배경 밑에서 화랑도와 같은 굳건한 무인정신이 확립되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요, 따라서 무예체육 또한 성행되었을 것이다.

통일기에 들어와 문물제도가 더욱 정비되고 학문과 예술이 발흥(勃興)하면서 무예도 점차 발전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안정되고 유교가 도입된 이후부터 국학의 설치, 독서삼품과의 시행 등 문치 중심의 체제로 이행됨에 따라 강건한 민족의식과 무예체육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지배층의 안일과 문약(文弱)으로 인하여 통일의 원동력인 화랑도가 흩어지면서 무예와 더불어 체육도 쇠퇴하였다.

삼국시대는 상호 교전시대였으므로 유희·오락에 있어서도 무예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다. 또한 당시의 봉건적 계급사회를 강하게 반영하는 민속유희나 오락이 많았다. 예를 들면 투호(投壺: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많이 넣는 수효로 승부를 가리는 놀이)·축국(蹴鞠:옛날 장정들이 꿩깃이 꽂힌 공을 발로 차던 놀이)·위기(圍棊: 바둑)·저포(樗蒲: 백제에서 행해지던 일종의 주사위 놀이)·악삭(握槊: 주사위 돌을 던져 나오는 끗수대로 말을 움직여 먼저 궁에 들여보내는 놀이) 등은 상류사회의 사교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서민층 계급에서는 민속가무·각저·수박 등 민속유희와 오락을 즐겼다. 일반 대중의 놀이로는 불교행사·무제행사(巫祭行事)·축제의식·국경일·정초·단오·추석 등을 중심으로 민속놀이가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또 이 시기는 문명의 발전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으며 생활을 즐기기 위한 문화적 유희·오락이 매우 성행하였다.

무예 및 유희·오락의 종류로는 궁사·투호·축국·각저·수박·기사(騎射)·수렵·추천(鞦韆:그네뛰기)·저포·위기·악삭·죽마(竹馬)·풍연(風鳶)·가무·검무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그 형태는 근대체육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전쟁문화가 생활문화로 전환되었고 예술이 발전되었으므로 유희·오락도 그 영향을 받았다.

고려시대의 체육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금 통일국가를 건설한 고려왕조는 귀족적인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무력의 배경 아래 왕실을 위협하던 호족들의 발호(跋扈)를 겪은 고려 초를 지나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광종은 문과뿐인 과거를 시행하였고, 성종은 문반 위주로 관직체제를 정비하였다. 최고관직인 재상급은 문반직이었으며 군사의 대무(大務)는 문반이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유수한 호족들은 문과를 통하여 입신하였고 왕실 및 상호간에 연척(緣戚)을 맺으며, 최고의 지배신분인 문반의 귀족계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요(遼)·금(金)·원(元)나라의 대륙세력과 투쟁을 계속하였으므로 무예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09년(예종 4) 국자감에 무학(武學)을 설치, 우수한 무관을 양성하여 국방을 강건히 하고자 한 사실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체육의 특징을 살펴보면 삼국시대나 마찬가지로 무예체육이 중심이 되어 행하여졌으며, 귀족계급의 형성으로 관상(觀賞)의 기호로서 신체적 활동에 유희 경기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특히, 고려는 국초부터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였고 북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강건한 무인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기사·격구·수박·수희 등을 통하여 꾸준히 무예를 단련하였고 민족융합과 북진개척의 국민정신을 배양하였다. 또한 안정된 사회생활을 배경으로 예속적(禮俗的) 명절행사와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정월의 설, 5월 단오, 8월 가배(嘉俳), 4월 초파일,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의 국가적인 행사에는 각종 연회를 베풀고 온갖 유희를 벌이는 풍속이 있었다.

상류층에서는 격구와 투호, 일반 부녀자는 그네뛰기, 남자는 씨름·석전 등의 여러 가지 유희·오락이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목은시고(牧隱詩藁)』 등에서는 “궁내에서도 조신간(朝臣間)에 격구·투호가 행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대에 크게 유행한 격구는 기술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것이며, 동시에 무예로 행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스포츠·유희로 일반 민중에서도 널리 행하여졌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고려시대에는 무예 일반에 걸쳐 경기적인 요소가 크게 가미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으로 중시되었던 기마술은 격구로 발전하였고, 궁사에는 내기[賭]가 유행하게 되었다. 수군(水軍)의 수련인 수희나 무사의 개인기(個人技)인 수박은 귀족의 관람용으로 시범되었다.

특히 무예수련의 풍조가 가장 성하였던 의종대에는 상장군(上將軍)인 이소응(李紹膺)과 정중부(鄭中夫) 등이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라 하여 단체경기를 한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역시 그 기술적인 면에서 일단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 경기적인 요소의 가미는 체육적인 면에서의 발전적인 현상이기도 한 것이었다.

한편, 고려 귀족들의 생활은 일반 유희·오락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인 듯하다. 전대로부터 시작되는 제반 유희·오락은 고려에서도 만연되었다. 팔관회·연등회·단오절의 격구 등의 치사(侈奢)에 관한 기록과, 당시 사료에 나오는 잡희(雜戱)라든가 현재 발견되는 고려시대의 가면 등은 일면 연극적인 요소까지도 이 시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건강·위생적인 면에서도 고려시대는 획기적인 진전을 보인 시기이다. 아직도 건강과 질병치료에 있어서 무당이나 불교에 의지하려는 원시적인 요소가 계속되고 있지만, 보다 합리적인 의술이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미 태조 때부터 의학교육이 실시되었으며, 과거에 의과(醫科)가 설치되고 의료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물론 신앙적인 치병관(治病觀)에서 벗어나 의료가 치료·치병의 수단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진전인 것이다.

그런데 체육사적 견지에서 더욱 중요시되는 것은 혜민국(惠民局)·대비원(大悲院) 등의 의료시설이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것이 불교사회에서의 신앙적 자비심에서 베풀어진 배려이기는 하였으나, 당시 국민건강에 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인정된다.

조선시대의 체육

조선시대의 체육은 그 목표나 방법에 있어서 갑오개혁 이전과 이후에 상이한 차이가 있다. 갑오개혁 이전 봉건사회의 체육은 주로 무예를 중심으로 하여 행하여졌으나, 갑오개혁 이후의 체육은 구미·일본 등으로부터 소개된 교육사조를 배경으로 체조·유희·교련 등을 내용으로 행하여졌으니, 곧 무사 중심의 체육에서 서민 중심의 체육으로 변천된 것이라 하겠다.

갑오개혁 이전

조선시대에는 문무를 차별하고 육체적 활동을 천시하는 유교적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무예 및 이에 따르는 체육의 발달은 부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관을 과거에 의하여 등용하였고, 평시에 군사훈련과 무예강습 등을 대폭 정비, 강화시켰으므로 전(箭)·기창(騎槍)·총(銃)·격구·편(鞭)·관혁(貫革) 등의 무술이 발전하였다.

병제(兵制) 역시 고려의 제도를 이어 전국민을 민정(民丁)으로써 부병(府兵)으로 삼고 농한기에 군사를 습득시켜 위사(衛士)로써 서울에 윤번(輪番), 숙위(宿衛)하게 하는 농병일치주의(農兵一致主義)를 지향하였으나, 일반 국민들의 기상은 대체적으로 안일하였다.

그러나 임진·병자의 양란(兩亂)을 통하여 모든 체제가 전시체제로 편성되어 1593년(선조 26) 서울에 훈련도감을 두고 오부(五部)의 장정을 뽑아 무예를 가르치고, 지방에도 초관(哨官) 또는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선조 때의 한교(韓嶠)는 학술적으로 고금의 비법을 연구하고 70여 인을 모집하여 무예교육을 시켜서 임진왜란 때 응용한 일이 있으며, 『무예제보(武藝諸譜)』 등의 무술교과서를 저술하여 무예교육에 공헌한 바 컸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정조는 이덕무(李德懋) 등을 시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의 병서(兵書)를 편찬하였다. 바야흐로 무술은 숙련만을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대의 것보다 진보하여, 근대화를 지향하는 초보적 이론단계에 도달한 감이 있다.

이러한 특정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 시기의 특징인 극단의 문약(文弱)과 무사 천시풍조가 무예의 부진을 초래하고 체육 또한 무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무예 중심의 체육에 그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번쇄(煩碎: 너더분하고 자질구레함)한 공리공담의 주자학은 중기 이후 신학풍의 싹을 질식하게 하고 유교적인 독립, 쇄국적인 사회를 더욱 굳게 하였다.

무사의 체육으로는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여러 무예를 계승하여 기사(騎射)·사술(射術)·창사(槍射)·검술·격구·모구사(毛毬射)·수박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행하여졌다. 조선시대는 주자학적 문치주의의 봉건적 관료국가였다. 문(文)을 숭상하는 나머지 신체적 활동을 경시한 사회풍조는 체육활동의 위축을 가져왔으나 상류 양반층 취미의 유희와 오락은 존재하였다.

한편 농촌사회에 있어서도 농한기와 각종 명절을 중심으로 유희·오락 생활이 있었다. 촌락에서 행하여지는 제례나 명절에는 고래의 유풍을 좇아 농한기에 씨름·그네뛰기·줄다리기·농악 같은 것을 즐겨 행하였다.

널뛰기(板跳·板舞)·연날리기·활쏘기·씨름·수박·설마(雪馬:썰매)·사희(柶戱)·쌍륙(雙六)·장기·척전(擲錢)·격양(擊壤)·공기(拱碁)·도색희(蹈索戱)·줄다리기·석전·방응(放鷹) 등이 오락과 유희로서 행하여졌고, 특히 어린이들 사이에는 죽마(竹馬)·축국·제기차기·줄넘기 등이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의감(典醫監)·내의원(內醫院) 등의 궁중의료기관이나 혜민국·치종청(治腫廳)의 서민의료기관이 생겨나고, 의녀(醫女)의 존재가 일반화되었다. 특히 한방의학이 큰 발전을 보아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신증향약제생집성방』·『의방유취 醫方類聚』·『동의보감』 등 의서가 편간되었다.

또한, 자기 건강을 위한 보건의 관심이 높아져 실내의료체조·안마·지압의 방법을 취한 의료체조 등이 보이는데, 그 대표적 예가 이황(李滉)의 활인심방(活人心方)과 세종대부터의 바라문안마법 등이다.

갑오개혁 이후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제반 정치·문물제도가 혁신되어 종래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 외국과 접촉하게 되면서 1895년 오늘날과 같은 교육령에 의하여 각급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체조를 교과목으로 과하게 되어, 각급 학교에서 운동회 등과 같은 행사를 가지게 되면서 각종의 체육스포츠가 점차 싹트게 되었다.

1896년 5월 2일 영어학교에서 동소문 밖으로 소풍을 가 운동회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시초로 그 이후 매년 각 학교에서 운동회를 열게 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진전하여 마침내 각 학교 연합운동회로 발전하여 1905년부터 1909년에 이르러서는 운동회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1905년 5월 22일 신흥사(新興寺)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최초의 운동회를 개최하고, 다음해 3월 11일 괴동(槐洞) 김기정(金基正)의 집에서 현양운(玄暘運)·신봉휴(申鳳休)·한상우(韓相宇) 등의 발기로 대한체육구락부가 발족되었다.

같은 해 6월 10일 40여 명이 동문 밖 영도사(永道寺)에서 조직적인 체육기관의 주최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를 열어, 체육의 일반화와 아울러 학교체육이 병식체조(兵式體操)의 일부에 국한되었던 테두리를 벗어나 내용면과 실제면에서 충실해져 갔다. 한편, 이 운동회는 당시 개화운동의 추진체로서, 또는 국가적 중요행사로서의 면모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회의 자극을 받아 체육은 덕육(德育) 및 지육(知育)과 병행하여 국민교육에 불가결한 한 요소임을 인식하는 동시에, 국가정세에 비추어 체육운동을 통한 민족단결이야말로 국권갱생의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민간체육단체의 조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운동대회에는 친히 황제와 황후가 칙어(勅語)·휘지(徽旨)·상품 등을 하사하고 어람(御覽)하며 국민의 체육을 친림권려(親臨勸勵)하고 사기를 앙양시킨 것은 우리나라 체육사상 특기할 만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09년 4월 30일 학부 주최의 관·사립학교 연합운동회를 마지막으로 활기띤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것은 경술국치의 치욕적 사태에 분노한 국민의 배일사상이 높아짐에 따라 집단적 의거를 두려워하여, 같은 해 12월 27일자로 학부에서 재정난을 빙자로 연합운동회를 폐지시킨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철저한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교육과 체육을 통한 민족적 정신의 함양이 시급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각종 체육단체들이 결성되었고, 학생들이나 일반 사회인들이 다같이 체육단체에 참여하여 일본인들과 싸우고 민족정기를 북돋워 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체육

한일합방 후 우리 민족은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국권회복에 열성을 기울였다. 특히 건전하지 못한 신체로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여 국민의 건강한 신체와 민족정신의 함양, 그리고 운동회 등 체육행사를 통한 단결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여 일본화하고 성씨개명까지 실행하였다.

일제는 학교를 세워 일본인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 교육내용도 그들과 같이 개편하였다. 종래부터 내려오던 민속경기와 놀이는 그럴듯한 명목을 붙여 탄압하였으며, 심지어 윷놀이대회까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민족은 운동회 및 학교교련의 적극적인 참가, 체육단체 결성 등을 통하여 민족단결을 강화하고 국권갱생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 시대에 행하여진 체육의 내용을 보면 1910년부터 1927년까지는 보통체조와 병식체조가 중심이었으며, 스포츠의 도입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학교체육이 그 위치를 확립한 시기이다. 1927년부터 1942년까지는 스포츠 및 유희의 발전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육상경기·축구·럭비·수영·야구·농구·유도·탁구·권투 등 스포츠 단체들이 30여 개나 결성되었고, 1920년에는 조선체육회가 조직되었으며,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세계제패 등 체육이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 활동의 결과가 뚜렷하였던 시기이다.

1942년 이후는 체육이라기보다는 군사훈련시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좀더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 4월 11일부터 3일간 『동아일보』에 변봉현(邊鳳現)이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논설을 실어,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체육의 향상발전을 위하여서는 체육기관의 조직이 시급하다는 민족적 요망을 대변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같은 해 7월 13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징이며 활동력의 원천이 된 조선체육회가 조직되어 체육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체육계는 비로소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어 일취월장으로 조선체육의 탁월성을 과시, 일인을 제압하고 전일본 스포츠계를 독점하다시피 하여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우리나라 체육의 강력한 진출과 뛰어남을 일제는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비롯하여서 1941년의 메이지신궁대회 축구경기 닛코쿠(日穀)팀의 응수사건 등을 계기로 체육을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 민족문화의 발달, 반일의식의 앙양 등을 감지한 일제는 드디어 『동아일보』의 폐간을 비롯하여, 체육단체의 해체와 강압적인 단속책을 자행하였다.

또한 1938년 7월 4일 조선체육회를 일인단체인 조선체육협회와 강제로 통합시켜 일인과 그 주구들에게 실권을 주어 일제의 어용단체로 만든 것을 비롯하여, 점차 모든 단체를 일인의 단체에 강제로 흡수하고 말았다.

일제 말기에는 점차 시국이 긴박해짐에 따라, 일본은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듬해 2월 14일 조선체육진흥회라는 체육통제기관을 발족시키고, 체육운동은 국가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스포츠 대신 이른바 국방경기라는 것을 등장시켰다. 이에 따라 종래의 각종 대회가 모두 중단되고, 전력증강운동이니 전력경기니 하는 따위의 군사훈련만을 강요하게 되어, 스포츠계는 그야말로 공백시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 이후의 체육

8·15광복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체육은 군국주의적 체육에서 탈피하였다. 학교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보건체육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였고, 대학에서도 교양필수과목으로 개설되었다. 한편, 체육대학 또는 체육과 등을 신설하였고 체조·스포츠·유희 등을 가르쳐 조화적·민주적 인간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교에서의 새로운 보건체육은 단순한 학교교육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보장생활·직업생활·사회생활·취미·오락생활 등 생활 전반의 기초를 배양함을 목적으로 한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학교체육의 새로운 변천에 따라 1945년 8월 조선체육동지회(대한체육회 전신)가 부활되고, 더불어 체조·스포츠·유희 등 각 분야에 체육단체가 생겨남으로써 새로운 체육시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47년 4월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서윤복(徐潤福)이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하고,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 참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체육이 그 본래 목적의 한 측면인 대인적·국제적 우호와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면을 당당히 성취하게 되어, 명실공히 새로운 세계체육의 대열 속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53년에는 체육학의 학문연구와 체제확립을 위하여 한국체육학회가 창설되어 체육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대회에서는 우리나라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레슬링에서 양정모(梁正模)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널리 국위를 선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국제경기대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82년 3월에는 체육부를 발족시켜 체육발전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여, 한국체육이 체육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들 양대회를 통하여 국민들의 체육 및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크게 증가되었으며, 각급 학교를 통한 체계적인 경기지도 및 사회체육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체육현실은 아직까지 전문적인 선수 양성에 집중되어 있고, 일반 학생들이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범국민적인 체육육성은 미흡한 실정이다. 이를 저해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인식을 하나하나 해결하고 바꾸어 나가면서, 국민의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국민체육이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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